칵테일 관련 기술, 책 구입해 독학으로...바텐더 사이트 개설, 진짜 프로 육성사업추진

‘쉐이크(shake)! 쉐이크! 붕~붕!’초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9월7일 오후 주한 영국대사관 뒤 뜰. 바텐더의 손을 떠난 위스키병들이 아슬아슬 곡예를 벌인다. ‘2001 비피터(Beefeater) 바텐더 경연대회’가 올 여름의 끝을 장식하듯 열기가 뜨겁다. 결선에 진출한 바텐더들이 저마다 현란한 몸동작으로 재주를 뽐낸다. 흥겨운 로큰롤 반주에 맞춰 술병을 사방팔방 자유자재로 돌리며 춤추는가 하면 마술을 곁들인 퍼포먼스에 가수 유승준을 흉내낸 쇼와 영화 <마스크 designtimesp=21512>의 주인공 분장도 무대를 들썩이게 한다.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른 여성 바텐더가 섹시한 표정으로 윙크와 키스를 던질 땐 관중들 모두 자지러질 수밖에.바텐더들의 한바탕 잔치가 한껏 무르익어 갈 즈음 맨 마지막 선수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모두 그를 기다렸다는 듯. 앞선 선수들과는 달리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차림의 심플한 이미지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부드러운 그의 얼굴엔 당황하거나 긴장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출전 선수들 중 가장 선배”라는 사회자의 소개가 없었더라도 베테랑 바텐더란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9년전 입문 … 베테랑 바텐더로 활짝그는 바로 칵테일 마니아들 사이에서 ‘니콜라스(세례명)’란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진 프로 플래어 바텐더 안재천씨(32). ‘플래어(Flair)’란 칵테일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바텐더가 병과 컵을 들고 다양한 동작으로 섞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플래어를 하는 동안 한 순간도 여유있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승부를 내겠다는 생각보단 차라리 후배들에게 정통 플래어의 진수를 한 수 가르쳐주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그래선지 이 대회에서 그는 3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우승자가 취재진들이 퍼붇는 플래시 세례를 받는 동안 태연스레 짐을 꾸리던 그가 웃으며 말한다.“3위 안에 든 것조차 후배들한테 미안할 뿐이죠. 아예 꼴등을 했으면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을텐데 말예요. 하나 더 아쉬운 점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와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서울 청담동에서 ‘바람(BARAAM)’이란 이름의 퓨전 칵테일바를 운영하는 안씨가 바텐더에 입문 한 건 9년전. 8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패스트푸드점과 세미 클래식바에서 서빙을 배웠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신부. 고교시절 수도원으로 가출했던 적도 있다. 신학대학 진학이 주위의 반대에 부딪치자 임시방편으로 택했던 일이 서빙이었다. 그 후 언론인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자원한 해병대를 나와서도 뚜렷한 진로를 못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1백가지 유망직업’을 소개한 책을 읽다가 그 속에서 바텐더를 찾아낸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바 웨이터와 바텐더의 구분이 모호할 뿐 아니라 칵테일 제조를 가르치는 곳도 드물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바텐더 전문학원에서 한 달 동안 배운 건 ‘독학으로 뚫어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양조학 개론’을 비롯해 바텐더와 칵테일에 관련된 책들을 섭렵하는 한편 조그만 칵테일바에서 일하며 바텐더 실무를 쌓았다. 그러던 중 국내에 들어온 한 패밀리레스토랑의 칵테일바에서 본 바텐더가 신선한 충격을 던져 줬다. 이른바 ‘플래어’란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즈음 나온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칵테일 designtimesp=21525>이 대중들 사이에 ‘플래어 바텐더’의 신드롬을 일으킨 것도 그를 자극했다.“훌륭한 플래어로 승부 내겠다” 각오그의 선택은 분명했다. ‘그래, 플래어 바텐더에 내 전부를 건다!’ 훌륭한 칵테일에 못지 않은 훌륭한 플래어로 승부를 내겠다고 맘 먹은 것이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기술을 익힌 덕분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에서 이름있는 바텐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그를 찾는 손님이 팬이 됐고 그 중엔 극성스런 여성팬들도 많았다. 그가 바를 옮길 때마다 단골 손님들도 따라왔고 20대 후반에 연봉이 4천만원을 넘을 정도로 소속 바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96년 인기 토크쇼 프로그램인 ‘이홍렬쇼’에 출연해 3개월간 플래어를 보여줬던 첫 번째 바텐더도 바로 그였다.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란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내엔 이렇다할 바텐더 대회가 없었지만 밖에선 한 해에도 수백개가 넘는 세계적인 대결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죠.”곧바로 세계플래어바텐더협회에 가입한 후 국제대회를 준비했다. 지난해 1월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바텐더 대회인 ‘레전드 오브 바텐딩(Legend of Bartending)’에 참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이 대회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출전한 것이었다. 모두 84명의 각국 대표들과 겨뤄 22위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냈다. 그 뒤 그해 11월 올랜도대회에 이어 올 3월 라스베이거스대회에 재도전해 1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혼자 힘으로 개척한 결과였다.그가 창작한 칵테일은 한두 개가 아니다. 그중 3가지 색으로 3가지 맛과 3가지 향을 낸 ‘라벤다’를 비롯해 푸른바다와 흰 모래사장를 연상케 하는 ‘화이트 비취’, 중간에 투명한 띠를 두른 ‘러브이즈’ 등은 그가 상품화에 성공한 걸작들이다.그에겐 바텐더로서의 철학이 있다. 바로 칵테일을 마실 손님과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 “바텐더는 바(Bar)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마주보는 사람이죠. 손님이 원하는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선 그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맛과 향, 색 모두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느낌’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같은 재료를 써도 다른 느낌의 칵테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란다. 그는 플래어에서도 프로 근성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잔재주나 퍼포먼스보다는 우선 기본부터 갖춰야 한다는 것. “국제대회에선 국내와는 달리 병마개를 열어 둔 채 플래어를 합니다. 진짜 프로라면 술을 흘리지 않고 칵테일을 만들 수 있어야 하니까요.”현재 자신의 바를 차리고 ‘사장님’이 됐지만 언제나 바텐더로 남겠다는 그에겐 꿈이 하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전세계 바텐더들이 모여 저마다 기량을 뽐내며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 명이라도 더 국제 대회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게 먼저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를 위해 10월엔 플래어 바텐더들을 위한 커뮤니티 사이트인 ‘플래어마니아(www.flairmania.com)’도 오픈할 계획이다. 이 곳에서 해외의 앞선 노하우를 전하고 바텐더의 프로정신을 키워나갈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