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과 여러 가지 반찬이 함께 들어 있는 도시락은 동양식 메뉴다. 한국에서도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와 전혀 낯설지 않은 메뉴지만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먹거리다. 점심시간만 되면 도심의 사무빌딩 근처는 도시락을 파는 미니트럭과 수레가 장사진을 치고 샐러리맨과 여사원들은 너도 나도 도시락이 든 비닐 봉지를 하나씩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긴다. 편의점은 물론이고 기차역 플랫폼에는 승객을 위한 도시락 코너가 여러개 설치돼 있다. 도시락이 얼마나 일반 서민들의 대중화된 먹거리인가를 보여 주는 증거다.그런데 일본인들이 ‘오벤토’라고 발음하는 도시락의 판매전선에 최근 묘한 변화가 하나 일어났다. 일본인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일본적이라고 자부해온 ‘도시락’ 시장에 미국에서 미국 쌀과 미국 식자재로 만들어진 도시락이 태평양을 건너 밀고 들어온 것이다. 도시락은 분명 신선도가 생명이다. 그런데도 미제 도시락이 배로 열흘 이상 걸리는 바다를 건너와 일본 땅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미제 도시락의 탄생 배경과 제조 과정,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사뭇 흥미롭다. 미제 도시락은 한마디로 말해 냉동식품이다. 영하 20도의 얼린 상태로 일본에 들어온 후 판매되기 직전 해동 과정을 거쳐 보통 밥처럼 다시 태어난다.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대충 만든 것은 아니다. 쌀과 야채는 유기재배의 고급 재료만을 사용한다. 소 닭고기는 항생제를 먹이지 않고 사육해 도축한 식육만을 엄선해 쓴다. 원재료에 관한 한 일본 본토의 것들을 오히려 능가할 만하다는 평이다. 수입업체도 중소회사가 아니다. 동해도 신칸센열차와 도쿄일대의 수도권전철을 운영하는 회사인 JR동일본이 자회사를 통해 들여와 판다.이 회사가 미제 도시락에 눈을 돌리게 된 배경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외식업체들의 가격파괴 싸움으로 도시락의 가격경쟁력이 급속히 추락했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 파는 도시락의 경우 적어도 8백엔 이상은 줘야 요깃거리가 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반면 승객들은 2백~3백엔짜리 패스트푸드를 사가지고 열차에 오르는 경우가 크게 늘어나 어쩔 수 없이 대책 마련에 나서야 했다고 JR동일본측은 밝히고 있다. JR동일본은 미국 제휴회사가 만든 냉동도시락을 지난 7월 중순부터 매주 7만개씩 수입해 개당 6백엔씩에 팔고 있다. 또 식사량이 적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미니 도시락도 함께 발매하면서 3백엔 정도의 부담없는 값을 받아 호평을 얻고 있다.농촌지역구 출신 의원들 반발로 코너 몰리기도그러나 사상 최초의 외국산 도시락이라고 해서 도시락혁명으로까지 불리는 오벤토는 판매초기에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해 매스컴의 화제가 됐다. 자민당의 농촌지역구 출신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쌀이 남아 돌아 걱정인 데 굳이 미국산 도시락까지 들여다 팔아야 되느냐”며 집중 포화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의원들은 유권자 피해와 반발을 의식한 듯 오벤토 견제에 앞장 섰고 농림수산성 또한 의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JR동일본을 코너로 몰아 세웠다. JR동일본이 들여와 파는 미제 도시락은 쌀로 환산할 경우 수입량이 연간 3백t 정도에 불과해 일본이 북한에 지원키로 한 쌀 50만t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도 못되는 양이다. 일본 매스컴은 오벤토 해프닝과 관련, “소비자들의 호주머니 부담을 줄여줄 상품이 정치권의 반발을 산 또 하나의 케이스”라고 지적하며 의원들의 행태를 은근히 비꼬았다.서비스물가가 비싸기로 악명높은 일본에서 미국산 오벤토는 저가 양질의 외국산 제품이 경쟁력없는 일제를 시장에서 몰아낸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