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 후 반 실직 상태로 빈둥댔던 20대 후반의 하시모토 마사씨(남). 8백만엔이 넘는 빚만 지고 자포자기 상태로 하루 하루를 보냈던 그는 올 2월 변호사로부터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기별을 받았다.“법원에서 면책(책임면제)결정이 떨어졌습니다. 앞으로는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됩니다.”거액의 빚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그가 법원의 문을 두드린 것은 지난해 12월. 변호사가 일러주는 대로 자기 파산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을 뿐이었다. 신청서를 내고 난 후 그는 진행 상황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도 하지 않았던 법원의 결정이 이처럼 쉽게 내려지면서 자신을 빚의 수렁에서 끄집어 내주자 그는 깜짝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의 잣대가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도박으로 빚을 진 자신까지도 보호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였다.그는 파산 결정과 함께 은행은 물론 카드사 등 모든 금융회사로부터 퇴출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신용사회의 룰을 어긴 대가로 일상 거래가 금지됐음은 물론 한푼도 돈을 빌어 쓸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수년만 지나면 정상적으로 금융회사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터이니 그 동안 새 각오로 살아가겠다고 맘먹고 있다.30대 후반의 조리사 사카구치 다카시씨(남). 부친으로부터 조그만 음식점을 대물림으로 이어받아 장사를 해왔던 그는 지난해 말 파산했다. 주요 고객이었던 샐러리맨들이 돈 쓰기가 어려워져 발길을 끊자 하루가 멀다 하고 파리만 날리는 상태가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호전되면 나아지려니 믿고 신용금고에서 돈을 빌려 구멍을 메우며 계속 장사를 해 나갔다. 하지만 반년을 버티기가 어려웠다. 한꺼번에 돈을 갚을 수 없어 카드회사의 현금 서비스로 목돈을 조금씩 상환했지만 결국 카드사 10여곳에서 빌린 돈 3백50만엔마저 갚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렸다.변호사와 상담한 그는 그 걸음에 도쿄지방법원을 찾아가 파산 신청을 냈다. 그리고는 자기처럼 판사와의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이 30명이 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10년을 장기불황과 싸워 왔지만 일본은 아직 경제강국임에 틀림없다. 1천4백억엔에 달하는 개인 금융자산은 세계 최고수준이고, 갈수록 내리막길이긴 해도 한국의 전체 수출과 맞먹는 수치의 무역흑자를 내고 있다. 중국의 추격에 쫓긴다고는 하지만 제조업에서도 로봇, 공작기계, 정밀부품 등 첨단 제품은 “우리를 따라 올 나라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나타나기 힘들 것”이라며 일본인들은 콧대를 낮추지 않고 있다.그러나 전면에 내걸린 경제적 위상을 뒤로 한 채 그늘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법원 창구에 비친 일본의 모습은 병들고 쇠락한 보통국가 그 자체다. 이를 뒷받침하는 바로미터의 하나가 ‘자기 파산’이다. 전 재산을 다 털어도 빚을 갚을 수 없다며 채무자나 채권자가 법원에 퇴출 결정을 요구하는 이 제도는 물론 한국에도 있다. 자기 파산 결정을 받은 사람은 빚을 면제받는 대가로 신용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제재가 따르지만 외환위기 직후 사상 최대의 경제 난국에서 자기 파산은 채무자들에게 빚과 죽음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기도 했다. 자기 파산은 그야말로 막다른 상황에 몰려 더 이상의 선택 여지가 없을 때 신용과 인격을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받는 구제 카드인 셈이다. 따라서 자기 파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고통이 가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2000년 신청건수 15만여건 사상 최대법인을 포함한 일본의 자기 파산 신청건수는 2000년 한햇 동안 14만5천8백58건에 달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으로 최근 조사됐다. 이는 1만2천4백78건에 불과했던 90년과 비교할 때 10년간 무려 11배가 늘어난 것이다. 14만5천건을 크게 넘은 2000년 신청건수 중 법인은 4.2%에 불과, 법이 제공하는 최후의 은신처로 피신한 절대 다수가 개인인 것으로 나타났다.자기 파산 신청은 특히 90년대 중반까지 증가세가 주춤했으나 97년 7만6천건 돌파를 계기로 그 이후 줄곧 급상승세를 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97년 이후 눈에 띄게 활력을 잃은 데다 올 들어서는 불황의 골이 더 깊어졌다고 지적, 자기 파산 신청이 연말까지 16만건을 넘어설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일본 법원은 자기 파산 신청이 급증한 이유에 대해 다각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 불황으로 살림살이가 한계에 부닥치면서 일반 서민들의 파산에 대한 저항감과 수치심이 희박해졌다는 것을 꼽고 있다. 재야 법조계의 조사는 법원의 이같은 주장을 근거있는 해석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변호사연합회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의 자기 파산은 20대 신청자의 수가 급감한 반면 노년층 숫자는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60~70대가 자기 파산 신청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92년 8%에 불과했으나 2000년 15%로 거의 배 가까이 뛰었다. 이와는 달리 17%를 점했던 20대의 비율은 12%로 눈에 띄게 낮아졌다. 연합회는 이에 따라 돈 절제가 어려운 20대 대신 경제적 능력이 달리는 60대 이상 노약자들의 비율이 높아진 것이야말로 ‘생계형 파산자’들의 수가 급증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하고 있다.법조계 일각에서는 경제난과 함께 법원이 자기 파산의 문턱을 낮춘 것도 신청자 수를 크게 늘린 한 원인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쿄지방법원의 경우 지난 99년 3월까지만 해도 자기 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수개월 지난 후 결과를 통보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법원은 99년 4월부터 자기 파산의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자격도 완화했다.문턱을 낮춘 것은 도쿄지방법원만이 아니었다. 나고야지방법원은 파산과 면책을 동시에 신청할 수 있도록 했으며 대다수 법원들이 1~2년씩 걸렸던 면책 결정 기간을 평균 5~6개월로 단축했다. 법원의 이같은 절차 간소화는 다중 채무에 얽힌 신청자들의 상황이 더 악화되고 꼬이기 전에 빨리 재기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하지만 길을 넓힌 데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 파산법은 도박이나 낭비로 재산을 날린 경우에는 면책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절차가 빨라진 후 법 취지에 맞지 않는 사례도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법조계 인사들은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약자를 구제하려는 법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를 악용해 이익을 취하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어떻게 막느냐가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일본 경제가 2차 대전 후 최악의 국면으로 빠져 들면서 항복을 선언하는 자기 파산 신청자는 앞으로도 줄을 이을 것이 확실한 상태다. 변호사 연합회의 우츠노미야 켄지 변호사는 “어떻게 절차를 밟아야 할지 모르는 잠재적 파산자가 도처에 널려 있다”며”최고 2백만명에 가까운 파산 예비군이 법원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일본 정부는 경제 강국의 옛 명성 회복을 염원하고 있지만 법의 보호에 몸을 맡기려는 자기 파산자의 대량생산은 일본 몰락을 비춰주는 또 하나의 거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