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에는 간판을 내리는 은행이 몇 곳 나올 것이다.” 지난 1월 8일 금융감독원이 ‘2001년 일반은행의 경영실적’을 발표하던 날, 한 금융감독위원회 고위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이미 은행권 전체에 2차 합병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거대 국민은행이 공식출범한 지난해 11월 이후 전 은행권의 지각변동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IMF 위기 속에 지난 1998년 탄생했던 금융감독위원회는 설립 당시부터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최우선 목표였다. 당시 이헌재 위원장은 “지금은 시장 기능이 깨져 있기 때문에 정부는 제도구축을 우선순위로 삼겠다”고 기자들 앞에서 되뇌었다. 시장원리를 기대하기에는 인프라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는 의미였다. 이위원장은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리딩뱅크의 필요성과 출현을 강조했고, 이후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은 그의 청사진대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난 1999년 금융연구원은 ‘한국 금융시스템 재구축 방안’이란 이름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형식은 토론회였지만 사실상 앞으로 이뤄질 금융권의 지각변동을 예고한 세미나였다. 이 자리에서 최흥식 부원장은 “앞으로 금융권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재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즉 대규모 고객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시장을 공략하는 금융기관이 4∼6곳, 그리고 틈새시장을 노리는 금융기관, 다시 말해서 증권사가 변신한 투자은행이 5∼8곳이 있고, 나머지로 지역밀착형 금융기관인 지역은행과 신협 등을 꼽았다(그림 참조). 그는 첫째 범주에서 대규모로 전세계 50위권에 들어가는 2∼3곳의 은행이 탄생할 것임을 적시했다. 한국 금융권의 현실에 비춰볼 때 세계 50위권의 거대은행 2∼3곳이 출현한다면 나머지 중규모의 은행은 그 영향력에 휩쓸려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거대 국민은행의 탄생은 은행권 대지각변동의 시작에 불과하다. 한 금감위 고위 관계자는 지난 2000년 12월 김정태 행장과 김상훈 당시 국민은행장(현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이 전격적으로 합병에 합의하자 “이제는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모두들 합병시장에 자신들을 내놓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국민은행의 자산규모를 보면 왜 다른 은행이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국민은행의 자산규모는 185조원, 세계60위권이다. 최근 합병파트너로 거론되고 있는 신한과 한미은행을 합쳐도 93조원대라는 점에 비춰볼 때 이런 ‘거함’이 파도를 일으키면 ‘조각배’ 수준에 불과한 다른 은행들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주회사 형태로 덩치를 키우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을 하지 않는다면 은행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떠밀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합병만이 유일한 대안하지만 기존의 은행들이 지주회사로 덩치를 키우는 방법은 이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금융과 신한지주가 출범한 마당에 더 이상 지주회사로 묶을 은행도 없다. 지난 2000년에 정부가 한빛에 조흥과 외환 은행 등을 통합, 금융지주회사로 묶으려는 시도를 했을 당시 두 은행 노조가 극구 반대해 무산됐다. 이때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제 지주회사로 가는 티켓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의 말대로 금융지주회사는 우리금융과 신한지주에서 마무리됐고, 뒤늦게 조흥은행이 지주회사를 설립하려 했지만 거의 무산된 판국이다.따라서 각 우량은행은 다른 우량은행과의 합병을 위해 뛰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일부 언론에서 ‘신한과 한미은행의 합병이 마무리됐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자 두 은행이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신한은행이 한미뿐 아니라 여러 은행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높다.신한지주는 신한은행과 자회사였던 신한증권·신한생명 등을 묶어 민간주도의 첫 지주회사로 출범했지만, 자산규모가 60조원대에 불과해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신한지주는 우선 2005년까지 지주회사의 자산을 160조원대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비은행부문 비중을 전체 40%로 늘리면 자연스럽게 자산규모가 커지고 이렇게 해서 시너지를 노리겠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신한은행 관계자는 “은행 대형화도 필요하면 시도하겠다”고 말해 합병추진의 여지를 남겼다.한미은행이나 칼라일측은 신한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합병의 파트너가 꼭 신한은행이어야 한다는 판단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올해 3,000억원 이상의 이익을 올린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 이럴 경우 한미은행의 가치는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합병협상에서 좀더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한미가 고려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은행은 지난 2000년 말 칼라일 펀드의 일방적인 합병 파기 선언 이후 대화 재개가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남는 곳은 국민은행이다. 특히 칼라일 펀드는 김정태 행장의 역량으로 볼 때 합병할 경우 한미은행의 주가가 올라갈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지난 2000년 주택은행과의 합병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다만 문제는 거대 국민은행이 출범한 이후 김정태 행장의 태도다. 김행장은 지난해 12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국민은행의 조직통합이 우선 과제”라면서 “추가합병은 지금 검토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만일 한미가 국민은행과 본격 협상을 시작하면 하나은행이 곤란한 입장에 처해진다. 하나은행이 지금이야 우량은행에 속하지만, ‘거함’들이 왕래하면 입장이 곤란해진다.하나은행 김승유 행장은 지난 1998년 충청은행, 1999년 보람은행과의 합병을 성사시켜 은행권에서는 성공적인 ‘합병 CEO’로 평판이 나 있다. 하지만 한미은행과의 협상이 물거품이 된 후 상당한 고민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는 가능한 파트너로 제일은행 정도가 남아 있는 상황인데, 제일은행은 노조의 입김이 너무 세 대주주인 뉴브리지조차 털고 떠나려는 분위기여서 과연 합병이 성사될지가 주목된다.종합해 보면 2002년 은행합병의 캐스팅 보트는 사실상 한미은행이 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미가 국민을 택하느냐, 신한을 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은행권의 판도가 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