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케인즈가 다시 살아나 지금 세계경제를 본다면 무엇을 느끼게 될까. 그는 무력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재정정책의 효용성을 강조한 그의 이론(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은 서방 국가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 역할을 배제한 신자유주의학파(시카고 학파)에 자신의 이론이 밀리고 있음을 보고는 속상해할 수도 있다.그러나 케인즈가 위안을 얻을 만한 나라가 하나 있다. 케인즈의 활동 시기에는 내전에 휩싸였던 중국이 바로 그 나라다. 중국은 지금 케인즈의 ‘지도사상’을 받들어 재정 정책을 경제운용의 주요 툴(Tool)로 사용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돈을 풀어 정부공사를 발주하고, 그 돈으로 내수를 부추겨 경기를 부양하고 있다.주룽지 총리는 중국 재정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주 총리는 ‘현존하는 케인즈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지난 3월 5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제9차 전국인민대회 5차 회의가 열렸다. 주 총리의 ‘정부공작 보고’가 이날 의제였다.그가 발표한 올해 경제정책의 첫 사안은 1,500억위안(약 23조원)의 국채 발행이었다. 주 총리는 “지속적인 성장 및 내수부양을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채를 발행할 것”이라며 “이 돈은 주로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사업에 투입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올해에도 지난해에 이어 적극적인 확대 재정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덧붙였다.주 총리가 내수부양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8년이었다. 이후 2001년까지 모두 5,100억위안(약 80조원)의 건설국채를 발행했다. 여기에 올 발행분 1,500억위안을 포함하면 5년 동안 모두 6,600억위안이 풀리는 셈이다. 우리 돈 약 103조원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주 총리의 논지는 명확하다.“중국은 지난 20여년 동안 경제성장을 해왔지만 그에 걸맞은 ‘내수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성장이 수출 투자 등 대외지향형 경제시스템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내수가 성장의 동력을 제공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중국 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 및 최근의 선진국 동시불황 속에서도 7∼8%의 굳건한 성장세를 지속했다. ‘세계경제의 오아시스’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장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재정정책이었다. 중국 지도층들도 ‘재정 확대정책은 적절했다’며 재정정책의 공을 숨기지 않는다.재정수지 추이를 보면 확대재정 정책의 정도를 금방 알 수 있다. 중앙정부 재정적자액은 지난 90년 147억위안(1위안=약 155원)에서 95년 582억위안, 2001년에는 2,598억위안으로 급증했다. 중국 재정부는 올해 재정 적자액을 지난해보다 19% 늘어난 3,098억위안으로 편성했다. 성장세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성장에는 늘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 학계 일각에서 재정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정에는 문제가 없다는 주 총리의 거듭된 발언에도 불구하고 재정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정부 돈 쏟아부을 곳 늘어나 고민저명한 경제학자인 판강(樊綱) 국민경제연구소 소장은 대표적인 인물. 그는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종합부채율은 40% 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재정에서 부담하는 사회보장비용 등 숨겨진 부채를 합치면 적어도 70%는 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산이다. 이는 미국(60%)보다 많고, 아시아 국가 및 유럽 국가의 평균치(60%)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판 소장은 “중국 재정은 아직은 ‘위기’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경고했다.문제는 재정 건전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재정수입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지난 86년까지만 해도 20%를 넘어섰으나 95년에는 10.7%로 급락했다. 이후 밀수단속, 국채 발행 등 재정수입 확대정책으로 다소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도 15% 선에 머물고 있다. 이는 선진국 평균 수준인 3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재정 여력은 별로 낳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게다가 중국 정부가 돈을 써야 할 분야는 늘어나고 있다. 국유기업 개혁으로 쏟아진 실업자를 구제해야 하고, 국가의 사회보장 지출도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10%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도시지역 실업자 구제 문제는 중국 경제개혁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다. 정부가 쥐고 있는 확대재정의 끈을 놓아버린다면 7%대 성장이라는 목표가 헝클어질 수도 있다.중국 정부는 ‘우려할 것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시앙화이청(項懷誠) 재정부장은 전인대 보고를 통해 “2001년 중앙재정 적자는 2,598억위안으로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7%, 중앙재정 잔여 채무액은 1조 5,608억위안으로 GDP 대비 16.3%에 머물고 있다”며 “이는 모두 국제적으로 지극히 건전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중국 재정부는 올해 재정적자액을 지난해보다 500억위안 늘어난 3,098억위안으로 잡았다. 약 19% 늘어난 수치다. 올 경제성장률 목표 7%와 비교하면 자칫 IMF(국제통화기금) 설정 안전 하한선인 3%를 넘을 수도 있다는 게 학계의 우려다.그렇다고 중국이 러시아와 같은 국가재정 디폴트(파산)로 빠져들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꾸준한 경제성장으로 재정 여력이 높아지고 있고, 국가 소유 주식(國有株) 매각 등의 추가 재정확보 방안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에 쌓여 있는 2,000억 달러 이상의 외환이 해외 부문에서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급작스런 충격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징 대학의 리이닝 교수는 “중국은 재정위기라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WTO 가입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 경제성장 둔화, 국유기업의 급격한 부실 증가 등의 충격이 닥칠 경우 국자재정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재정적자 급증은 경제개혁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고 있다”며 “재정투입의 투자효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중국 경제 성장세는 ‘케인즈의 충실한 제자’인 주 총리의 재정확대 정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들은 주 총리 이후의 중국 경제를 더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