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과 종업원을 위해 회사를 튼튼하게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외국 기업을 파트너로 고른 데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강한 회사, 좋은 회사를 만드는 데 굳이 돈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있는가?”3월 14일 기자회견을 가진 유통업체 세이유의 기우치 마사오 사장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잘라 말했다. 기우치 사장 옆에 앉은 미국 월마트의 홀리 국제담당 부사장 얼굴에서는 줄곧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일본 기자 몇십 명은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회견 내용 송고를 위해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거나 쏜살같이 뛰어나갔다.‘유통시장에 상륙한 거대한 쿠로후네(黑船)’ ‘유통업계 지각변동’ ‘종합상사 소매사업 전략수정 불가피’….이날 저녁 TV 뉴스를 시작으로 이튿날 오전 조간에 이르기까지 일본 언론은 주먹만한 활자의 제목을 곁들여가며 세이유가 월마트와 손잡았다는 소식 보도에 한꺼번에 열을 올렸다.냉정히 따져본다면 유통업계 세계 랭킹 1위를 자랑하는 미국 월마트의 일본 진출은 전혀 뜻밖의 소식이 아니었다. 월마트가 들어온다는 루머 자체가 오래 전부터 퍼져 있었던 데다 일본측 파트너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돼 왔기 때문이다.일본 유통업계에서는 월마트가 2001년 가을 도산한 마이칼과 제휴를 추진 중이며 점포 후보지를 물색 중이라는 소식이 정설처럼 굳어진 상태였다.그러나 월마트가 고른 짝짓기 상대는 매출 기준으로 유통업계 4위의 대형 슈퍼체인업체 세이유였다. 손을 잡은 방법도 독특했다. 세이유의 지분을 처음부터 대량 매수하거나 경영권을 넘겨받는 형태가 아니었다.세이유가 실시하는 제3자 할당증자에 월마트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오는 5월 30일까지 6.1%의 지분(60억엔)을 확보한다는 것이 첫번째 카드였다. 양측은 지분율을 단계적으로 높여 월마트가 2002년 12월까지 33.4%, 2005년 12월까지 50.1%, 2007년 12월까지 66.7%의 주식을 갖는다는 데 합의했다.계약 내용만으로 본다면 월마트의 일본 진출은 우회적이고도 우호적인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단독 진출이나 공격적인 경영권 매수 등의 전략을 구사하지 않고 일본 소비자들에게 낯익은 업체를 파트너로 고른 것부터가 그러했다.이복형제간의 재산분쟁으로 1953년 세이부철도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세이유는 일본 전역에 400여개의 중·대형 슈퍼마켓을 깔아놓고 있는 업체다. 2002년 2월 결산에서 1조 1,080억엔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128억엔의 경상이익을 올렸다.유통그룹 ‘세존’을 이끄는 핵심 기업으로 불리면서 깔끔한 매장관리와 센스있는 상품개발력으로 일본 소비자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업체였다. 따라서 그동안 구축한 회사 이미지와 영업 노하우를 감안할 때 독자 생존에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일본 유통업계의 지배적 평가였다.일본 언론은 월마트가 초기에 확보하기로 한 지분이 많지 않지만 세이유가 사실상 월마트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월마트의 참여가 다국적 자본에 따른 일본 유통시장의 판도 변화를 빠르게 진행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관측하고 있다.일본 전문가들과 언론은 이같은 분석의 근거로 월마트의 천하무적 파워와 일본 유통업체들의 열세,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 시장에 상륙한 다국적 유통기업들의 부진을 들고 있다. 월마트와 일본 유통업체들의 힘겨루기는 우선 게임조차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전문가들의 진단이다.미국을 본거지로 세계 10개국에 모두 4,400개의 점포를 운영 중인 월마트의 매출은 2000년의 경우 2,178억달러(약 28조엔)로 일본 최고라는 이토요카도의 8배를 가볍게 넘는다. 국가별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한다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맞먹을 정도다. 거미줄같이 퍼진 점포망과 가공할 파워의 상품 조달력은 일본 업체들의 가격경쟁력을 압도하고도 남는다.일본 유통업체들이 가장 겁내는 월마트의 힘도 전세계를 무대로 염가양질 상품을 조달해낸 후 이를 ‘에브리데이 로우 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 전략으로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 판매정책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일본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또 월마트의 상륙시기가 불황으로 일본 유통업체들이 기진맥진해져 있는 시점과 맞물려 있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유통업체 빅5 중 하나인 마이칼의 도산에 이어 일본 넘버 원으로 꼽혔던 다이에마저 은행권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하고 있는 현 상황은 월마트의 영향력 확대에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 유통업계는 일부 우량업체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은행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상태다.따라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가격경쟁력과 자금으로 무장한 월마트의 상륙은 현대식 무기를 앞세워 일본의 빗장을 열었던 ‘쿠로후네’나 다름없다고 전문가들은 단언한다. 페리 제독이 1853년에 몰고 온 쿠로후네는 서양문명과 담 쌓고 살던 일본을 함포로 윽박지르며 본격적인 개방, 개화의 길로 이끌었던 군함을 말한다.일본에는 쿠로후네와 같이 일본 업체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힘과 노하우로 월마트가 시장을 간단히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가 깔려 있는 것이다.일본 언론은 월마트가 몰고 올 태풍이 지금까지 다른 다국적 기업들을 통해 겪었던 바람과는 차원이 전혀 다를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이들은 2000년 12월 첫 점포 문을 연 프랑스 카르푸와 미국의 코스트코 홀세일의 경우 판매전략 미스 등의 이유로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상품 구성에서 일본 업체들과의 차별화에 실패했거나 소비자 특성을 감안치 않은 묶음판매 등을 고집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보고 있다. 치바현 마쿠하리 일대에서 대격전을 벌이고 있는 카르푸와 코스트코 홀세일 2호점은 모두 매출이 기대를 크게 밑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일본 언론은 그러나 세이유와 손잡은 월마트는 시장 공략방법부터 기존 다국적 자본과 크게 다르다고 여긴다. 일본 사정을 꿰뚫고 있는 세이유를 길잡이로 앞세우는 방식을 취하면서 소비자들의 저항감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고객들이 원하는 상품과 구매행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세이유의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상품과 가격경쟁력에서 타 업체들을 압도할 경우 월마트는 어렵지 않게 패권을 잡을 것이라고 이들은 확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