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의 등장은 지난 95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PC통신을 통해 축구정보를 교환하던 마니아들이 ‘우리 이러지 말고 만나서 한국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고 누군가 제안하면서 의기투합했다.이들은 며칠 뒤 서울시내 한 카페에서 모였고, 이 자리에서 프로축구팀과 국가대표팀의 응원문화를 바꿔보자는 데 합의했다. 초대회장은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신인철씨(34)가 맡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회원수가 고작 500여 명밖에 되지 않은 데다 활동도 많지 않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사무실도 따로 없었고, 집행부도 회장과 총무가 전부였다.‘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97년 5월 온라인 토론을 통해 정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으나 너무 긴 데다 촌스럽다는 이유로 바꿨다. PC통신을 통해 ‘레드일레븐’ ‘레드맥스’ 등의 이름이 거론됐으나 83년 한국 청소년대표팀이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뤘을 때 외국언론들이 한국대표팀을 표현했던 ‘붉은 악마’로 결정됐다.회원 12만명의 거대 집단으로 급성장98년 8월 프랑스월드컵 이후 붉은 악마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초대회장이 물러나면서 기로에 섰던 것이다. 이후 회원들 사이에 2대 회장(김태호)을 뽑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고, 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투명한 방법으로 회장을 뽑기 위해서였다. 회칙 역시 이때 제정됐다. 조직으로서 하나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새로운 집행부를 맞은 붉은 악마는 99년 드디어 모든 회원들의 염원이었던 사무실을 마련했다. 대한축구협회가 축구회관 4층에 방 하나를 내줘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축구협회가 붉은 악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이후 붉은 악마는 회원수를 급속도로 늘렸다. 99년 말 5,000명이었던 회원수는 2000년 말 기준으로 2만명을 기록해 1년 사이에 4배로 불어났다. 붉은 악마가 조직화되면서 공격적으로 회원들을 모집한 데다 월드컵이 2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국민적인 관심이 고조됐기 때문이다.회원수는 이후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2001년 말 마침내 5만명을 돌파했고, 2002년 6월 현재 12만명을 헤아리는 거대 집단으로 급부상했다. 올 들어서만 7만여 명이나 늘었다. 회원들은 20~30대가 대다수로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초등학교 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두루 참여한다. 여성회원들도 약 30%나 된다.붉은 악마의 운영도 이제 웬만한 기업의 조직을 방불케 할 만큼 짜임새를 갖추었다. 현재 전국을 수도권, 영남, 호남, 중부 등 4개 지부로 나누고 지부 밑으로 40여 개의 지회를 두고 있다. 기업체로 따지면 이사회와 같은 조직인 운영위원회에는 선거를 통해 뽑는 회장단 외에도 4명의 지부장, 월드컵특별위원장 등 10여 명의 운영위원들이 활동 중이다.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중앙’보다 ‘지부’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기업으로 치면 본사 기능은 최소화하고, 지사 기능을 강화하는 식이다.2001년 3월부터는 조직의 운영에 ‘경영’의 개념도 도입했다. (주)토피안과 대외사무대행 계약을 맺어 홈페이지 관리와 기업후원 분야를 맡겼다. 조직이 커지고 응원을 조직적으로 하면서 자금이 필요하게 됐고,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기업후원을 생각해냈던 것이다.그렇다면 붉은 악마가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먼저 모임의 순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이들은 모임의 목적을 ‘건전한 응원문화의 정착’에 두었다. 운동장에서 술 먹고 소리 지르는 것을 추방하자는 데 공감해 모였고, 이를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대외적인 목적이 뚜렷한 데다 동기 또한 순수했기에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셈이다.붉은 악마 성장 과정 성공한 기업 연상시켜국민스포츠인 축구를 매개체로 삼았던 점도 조직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축구는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한 스포츠다. 우리 국민들은 축구를 보며 웃고 웃었다. 일제시대에도 축구는 우리 민족의 한을 푸는 도구였다.붉은 악마는 처음부터 축구 하나만을 대상으로 삼았고,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지켜냈다. 경기장을 찾아가 응원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만만치 않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이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다.집행부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초대회장을 지낸 신인철씨는 단국대 치의학과 출신으로 대학재학 중 총학생회 간부를 지내며 경험했던 노하우를 십분 발휘했다. 특히 그는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응원에 솔선수범해 회원들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게다가 회장직을 내놓으면서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해 2기 집행부를 출범시키는 등 조직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히딩크가 한국축구를 살렸듯이 오늘의 붉은 악마가 있기까지 황무지를 개척한 장본인으로 신회장을 꼽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한동안 평회원으로 있던 신회장은 최근 4대 회장으로 집행부에 컴백했다.PC통신과 인터넷을 조직 활성화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활용한 점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들 두 매체의 경우 워낙 전파력이 강한 데다 정보를 공유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떤 수단보다 빠르기 때문에 붉은 악마를 하나로 묶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더욱이 아무런 조직이 갖춰지지 않았던 초기의 경우 PC통신이 구심적 역할을 했고,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폭발적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요즘에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모든 정보를 나누고, 회원가입도 받는다.붉은 악마의 성장 과정을 보면 마치 하나의 성공한 기업을 연상시킨다.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출발한 기업이 온갖 어려움 끝에 직원수를 하나둘 늘려가며 성공적으로 기반을 구축한 것과 아주 비슷하다.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붉은 악마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특히 ‘상업성 논란’은 붉은 악마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온 국민은 이제 붉은 악마 집행부가 어떤 결단을 내릴지 월드컵 경기를 시청할 때만큼이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