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보 '소송제일주의'로 억울한 피해자 양산...공적자금회수,합리적방안 모색 시급
사례1=대한생명의 대표계리인이었던 김원현 전 이사(53)는 요즘 서울 여의도에 있는 계리인협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월급을 받는 건 아니지만 집에만 있을 수도 없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협회사무실로 나온 지도 벌써 3년이 돼 간다.보험사의 상품설계는 물론 지출부문을 총괄 관리하는 계리인으로 한때 ‘잘나가던’ 그가 지금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건 대한생명에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부터다.공적자금 투입에 대표계리인으로서 민사상 책임이 있다며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가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김씨의 재산을 가압류하면서 그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예보는 대한생명이 98년 이전 계약자배당을 과다하게 실시, 회사가 부실해진 만큼 계약자배당을 담당했던 김전이사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98년 이전만 해도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 계약자 이익을 위해 배당을 일정 부분 이상 하도록 강요했던 게 현실이었다. 김전이사는 98년 이전에는 ‘정상적인 경영판단’에 속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달라지자 금융감독원이 ‘규정위반’이라며 문제를 삼은 것이다.금감원은 지난 99년 ‘대한생명이 960억원대의 계약자배당을 부당하게 해줬다’며 검찰에 고발했고 김전이사는 벌금형을 받았다.예보는 대한생명을 소송주체로 삼아 부실책임자들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사법적 판단까지 받은 사람을 제외시킬 수 없다”며 김전이사를 포함시켰으나 1심 재판부는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김전이사는 “과거의 관행을 개선해 금융개혁을 이룬다는 취지는 인정하지만 회사에 금전적 손실을 입히지도 않았는데 소송대상이 된 건 유감”이라며 “가압류가 들어오면서 경제활동에도 제약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김전이사는 1심에서 이긴 직후 모 보험사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지만 지난 6월 초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 관계자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고 있는 사람은 부담스럽다’며 거부 이유를 밝혔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로서는 예보가 야속하지만 예보는 요지부동이다.이에 대해 예보 류연수 이사는 “부실책임 심의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소송대상자들을 꼼꼼하게 심의해 소송에 들어간다”며 “김전이사건도 충분히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시작한 소송이었다”고 입장을 밝혔다.사례2==대한생명의 전 부회장이었던 최병억씨(2001년 사망)에 대한 소송은 예보가 ‘관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경우다.지난 87년부터 91년까지 사장으로, 96년까지는 부회장을 지냈던 최씨는 최순영 전 회장이 횡령한 1,380억원과 700억원대의 부실대출에 대해 책임이 있다며 지난 99년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형사고발을 당했다.최씨는 검찰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으면서 금감위의 행정처분이 무효라는 해석도 얻어냈지만 예보측의 민사소송을 피할 수는 없었다.예보는 이 건에 대한 검사에 착수하기 전인 지난 2000년 10월 대한생명측에 “일단 소송을 진행시킨 다음 부실책임 조사를 해서 진행 여부를 결정하자”며 민사소송을 제기하도록 지시했다.이후 2001년 부실책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뒤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한생명측에 소송취하를 통보하지 않은 바람에 최씨가 사망한 후에도 유족들을 상대로 소송이 진행 중인 것이다. 최전부회장은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01년 사망했다.소송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평생을 바쳤던 자신의 업적이 부인당하는 현실로 고통받았을 것이란 사실은 짐작이 가능하다.신익섭 대한생명 법무팀장은 이와 관련해 “예보가 지난 1월 최순영 회장 횡령 및 분식회계와 관련된 조사결과를 통보해주면서 최전부회장을 소송에서 제외시키라는 명시적 지시를 하지 않았다”며 “예보의 구체적인 지시나 공문이 없는데 회사가 임의로 소송을 취하시킬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사례3==이밖에도 보험업계에 소송과 관련된 쟁점이 많다. 은행이나 증권업 등 다른 금융업계보다는 관행에 의존한 영업이 많았던 탓도 있고, 또 영업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지난 98년 퇴출된 태양생명의 전 대표이사인 조모씨와 상무였던 박모씨는 단체보험을 받으면서 우회대출을 해줘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며 소송을 당한 상태다.조전사장은 98년 초 A 기업으로부터 단체보험 30억원을 받으면서 은행에서 발행한 개발신탁 100억원어치를 매입했고, 이 은행은 A기업에 100억원을 대출해줬다. 태양생명은 개발신탁채권을 곧바로 팔아 1억6,000만원의 차손을 입었다.예보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그러나 피고소인들은 “1억6,000만원의 손실을 입었다지만 30억원의 현금이 들어오면서 올린 이익이 그보다도 컸다”며 “예보가 숫자만 보고 건수올리기에 급급하다”고 주장했다. 이 건은 현재 법원에 계류 중으로 아직 1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예보소송제일주의 배경·현황=예보가 이처럼 공적자금회수에 지나치다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정치적 비판이 두렵기 때문이다.월드컵 열기가 식기 시작할 7월 초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금까지 투입된 공적자금의 규모와 회수가능한 공적자금의 범위 및 액수 등을 종합적으로 집계해 발표할 예정이다.이렇게 될 경우 정치권에서 공적자금의 투입과 회수작업에 대한 지적과 공세가 시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예보가 쫓기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그래서 예보의 소송이나 가압류가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지난 4월 말 현재 가압류대상 4,190건, 가압류 규모 1조1,378억원대라는 숫자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적자금이 투입된 거의 모든 금융기관 전현직 임직원을 향한 소송이 진행 중인 셈이다.반면 지금까지 가처분을 받은 건수는 전체 소송의 15% 가량인 697건에 불과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최종판결이 날 때까지 발생하는 불이익은 고스란히 당사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앞서 예로 들었던 사람들처럼 억울한 케이스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지난 97년 11월부터 올해 4월30일까지 국내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모두 156조원. 이 중 4월 말까지 회수된 금액은 46조6,000억원이다.이를 세목별로 보면 예보의 출자금 회수가 15조2,000억원이고 자산관리공사가 국제입찰이나 자산담보부채권(ABS) 발행 등으로 되돌려 받은 27조1,000억원과 정부가 발행했던 후순위채권 회수 등을 통한 4조3,000억원 등이다.출자금회수는 물론 자산매각 등의 방법으로 15조원의 공적자금을 이미 회수한 예보는 앞으로도 공적자금 지원 금융기관 및 일반 기업의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소송을 통해 상당부분의 공적자금을 환수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예보는 지금까지 301개 부실금융기관 임직원 2,466명의 은닉재산 1조1,300억원어치를 찾아냈고, 이를 토대로 손해배상소송(청구금액 1조1,584억원)을 진행 중이다.예보는 현재 우리, 조흥, 제일, 서울은행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8개 금융기관의 부실관련자를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실시 중이다. 예보는 이와 함께 진도 보성인터내셔널, 대농, 미도파 등 7개 부실기업 임직원들의 재산을 추적 중이다.예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실기업의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담당 회계법인은 물론 개별 회계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소송도 추진키로 했다. 예보는 이미 손해배상소송 방침이 통보된 고합 관련 회계사 10여 명에 대해 실사를 진행 중이다.고합 관련 실사가 끝나는 대로 대우계열사 분식회계에 책임이 있는 69명에 대해서도 손실책임을 파악 중이다. 부실기업 대부분이 분식회계를 통해 금융권에 손실을 입혔기 때문에 예보의 이 같은 방침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 회계사 상당수가 손해배상 소송에 휩싸일 것으로 회계업계는 전망하고 있다.“금융개혁 후퇴한다” 비판론 대두=예보가 무차별적으로 소송을 남발하면서 당초 의도했던 금융개혁이 오히려 후퇴하는 게 아니냐 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손해배상 소송의 시발은 악덕기업주와 그에 부화뇌동했던 일부 임원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지만 진행과정에서 예보측의 관료주의적인 법집행이 반발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대한생명 최전부회장 케이스에서 잘 드러나지만 예보는 조사가 확정되기도 전에 손해배상소송에 들어가도록 회사측에 지시했고, 회사는 당사자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시적인 공문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취하하지 않는 것이다.김원현 전 이사의 소송에서도 대한생명측은 1심 판결이 난 뒤 소송을 취하하고 가압류를 풀어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예보측은 법원의 최종판결까지 가자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이 과정에서 소송당사자와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고, 이는 예보는 물론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다가온다. 김전이사는 “예보가 부실의 책임을 찾는 건 좋지만 여론몰이식으로 진행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이제는 개혁작업 전체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지경”이라고 말했다.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예보의 공적자금 회수작업을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그러나 억울하게 피해보는 사람이 자꾸 생긴다면 예보의 업무에 근본적인 회의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