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의 기업경영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는 제조물책임(PL: Product Liability)법이 마침내 7월1일부터 시행된다. 지난 2000년 1월 법제정 이후 2년 반의 유예기간을 거친 결과다.재계 일각에서는 우리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PL법은 간단하게 말해 제품결함으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경우 기업의 과실이 없더라도 무조건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 지금까지는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반드시 제조업체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해야 했다.이 과정에서 지루한 소송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해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점만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기업들이 긴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PL법 시행을 계기로 외부에 불거져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대한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을 상담해보면 상당수가 PL법과 관련, 문제가 됐을 때 기업들이 입게 될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를 걱정하고 있다”며 “특히 국내에서 처음 도입되는 만큼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사례가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고 말했다.기업들의 준비부족도 심각하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다가 시행을 한 달 앞둔 6월에 들어서야 부랴부랴 준비에 나선 상태다. PL전담팀을 만들어 관련사항을 점검하고, 전담직원들을 교육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준비하는 형국이다.그나마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들은 사정이 좀 낫다. 기업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들은 손도 못 대는 곳이 부지기수다. 최근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PL법 시행에 대비해 사내 전담조직을 구성한 업체는 0.7%밖에 안 된다. 정부가 중소기업중앙회 차원의 대비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따지고 보면 기업들의 준비부족만 탓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법 공표 후 2년 이상 허송세월하다 지난 4월에야 업종별 PL센터 설립, 운용지침을 만들었을 정도로 정부 스스로 늑장대응한 측면이 강하다.적어도 6개월~1년 전에는 준비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것이 PL법 관련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우리보다 이 제도를 먼저 도입한 외국의 PL사고 사례도 국내 기업들의 초조감을 더한다. 일본의 경우 95년 PL법을 시행한 이후 첫해에 소비자 소송건수가 전년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났다.특히 식품회사인 유키지루시는 자사의 우유를 마신 학생 1만4,000여 명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바람에 약 500억원의 피해를 봤다. 소송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제기되면서 기업의 이미지 실추로 시장점유율이 크게 하락하고, 매출액도 30%나 추락했다. 사고가 터진 후 주가 역시 폭락해 투자자와 회사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미국에서는 PL소송으로 세계 최대규모의 석면회사가 파산한 사례도 있다. 또 국내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던 다우코닝사는 94년 가슴 성형수술용 실리콘이 이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송에 휘말려 홍역을 치렀다.사고가 터진 94년에만 6,800여 건의 소송이 제기됐으며, 지금까지 12만여 건의 소송이 발생했다. 사건이 터진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PL법이 반드시 기업들에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다.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특히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안전한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비교우위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 안전’이 최우선 과제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기본원칙 충실히 지키면 걱정할 것 없어”PL법 도입은 ‘준비된 기업’에는 마케팅에서도 매우 유리한 면이 있다. 제품에 자신 있는 기업들은 마케팅 과정에서 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는 점과 함께 안전성을 강조할 경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적으로 품질에 문제가 있는 기업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데 이점이 있는 것이다.PL법 전문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는 하종선 변호사는 “기업들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면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아직은 도입 초기라 기업들의 입장도 많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하변호사는 또 “제조물에 대한 기본원칙만 충실히 지키면 걱정할 것이 별로 없다”고 강조했다.PL법은 뒤집어 보면 소비자 주권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의미한다. 기업의 과실과 관계없이 피해만 입증할 수 있으면 손해배상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기업들과 옥신각신하며 보상해 달라고 싸울 필요가 없다. 소송에 앞서 소비자보호기관을 통한 분쟁해결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소비자 안전을 강조한 제품이 많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점 또한 소비자 권익 신장과 직결된다.제품을 믿고 쓸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다. 다만 PL법 시행과 관련해 기업들이 부담하는 비용은 소비자가 부담해야 한다. 소비자들로서는 ‘안전한 제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되는 것이다.어쨌든 PL법은 제조업체나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득과 실’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잘 활용하면 약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 완구나 식품관련업체들은 더욱 그렇다.PL법은 이제 기업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지금 당장 귀찮다고 도망만 다니다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정면으로 부닥쳐 안전한 제품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다.특히 PL제도는 19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이 제도를 택하지 않는 나라의 기업은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상황이다. 글로벌스탠더드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된 것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우리 기업과 제품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할 대상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