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은행 PB팀에서 일하는 최영진씨(30)는 최근 국내 모 증권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현 직장보다 1,000만원 정도 높은 연봉을 제시했다. 그러나 최씨는 “제의를 한 증권회사는 매일 밤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할 정도로 바쁘고, 주5일 근무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이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최씨는 “지금 회사에서는 돈은 덜 받지만 퇴근을 정시에 할 수 있으며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며 “당장 돈을 더 받겠다고 삶의 질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능력은 충분히 갖췄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을 감수하며 여가와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1990년 오스트리아 북부의 유고 접경지역인 클라겐푸르트. ‘시간 늦추기회’라는 모임이 창설됐다. 회장 페터 하인텔 교수(집단역학)는 “현대사회의 시간가속현상이 생활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쳐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며 “이 운동의 모토는 농사리듬처럼 현대 생활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 늦추기회’의 회원들, 일명 ‘슬로비족’이 벌인 시간 늦추기 운동은 그후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로 조용히 확산돼 갔다. ‘젊은(Young) 도시거주자(Urban)로 연소득 5만달러 이상의 전문직(Professional) 종사자’들인 여피(Yuppie)족이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던 신흥 부유층인 반면, 슬로비는 삶의 여유, 행복한 가정생활, 마음의 평화에 가치는 두는 부류다. 12여년이 지난 현재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 일하는,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슬로비족들이 전세계에서 발견되고 있다. 90년대 초반 소수였던 슬로비족은 21세기 초엽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을 정도로 늘어났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사회 트렌드를 이윤창출로 연결하는 데 그 누구보다 기민한 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25세에서 35살까지의 ‘2535세대’에 주로 포진하고 있는 슬로비족을 잡기 위한 한국 기업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다. 물질보다 마음을, 출세보다 가정을, 명예보다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슬로비족들을 타깃으로 하는 마케팅이 펼쳐지고 있다.대표적인 기업이 SK텔레콤이다. 지난 8월 출시한 여성전용 휴대전화 브랜드 ‘카라’의 타깃을 슬로비족으로 잡은 것. 판매타깃은 30~49세의 여성이지만 핵심 타깃층은(Core Target)은 32세의 슬로비족으로 설정했다.‘카라’의 기획자 조현준 SK텔레콤 세그먼트 마케팅본부 과장은 브랜드 출시 전 한국의 32세 여성들의 평균적인 삶의 모습을 분석했다. 조과장은 “32세 여성은 보통 결혼 4~5년차, 경제활동을 하는 비율을 35%, 자녀는 1~2세, 집은 마련하기 전이나 갓 마련했으며, 소득은 평균 250만원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32세 여성들은 삶의 여유를 누리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가족의 행복과 안정을 위한 풍요로움을 갈망한다”며 “그러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산다”고 말했다.SKT·삼성카드 등 적극 활용SK텔레콤은 이들 모습에서 슬로비족의 특성을 잡아냈고, 32세 슬로비족 여성을 타깃으로 카라 브랜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슬로비족 여성을 위해 헤어스튜디오, 홈인테리어 전문기업 등과 제휴했다. 또 카라 홈페이지에 주제 토론방을 열어 슬로비족 여성의 ‘자신을 찾으려는 욕구’를 반영했다.카드회사들의 ‘2535 슬로비족’을 잡으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최근 영화배우 정우성과 고소영을 CF모델로 내세워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삼성카드의 타깃층도 슬로비족. 임명선 삼성카드 브랜드매니지먼트팀 대리는 “일을 열심히 해 승진을 하면서도 크루즈에 승선해 여유를 누릴 줄 아는 2535 부부를 광고 속에 그려냈다”고 말했다.우리카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마음으로 쓰는 카드’라는 테마를 지니고 있다. 개인만을 위한 소비가 아닌 우리라는 가족의 행복을 중시하는 슬로비족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레저, 여행사업 부문 등을 대폭 강화한 ‘우리모아플렉스 카드’를 시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2535층을 겨냥한 것.‘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카피로 눈길을 끌었던 현대카드는 ‘열심히 일한 사람은 충분히 즐길 권리가 있으며, 일과 여가는 분리된다’라는 컨셉을 지니고 있다. 이 광고를 기획한 광고대행사 웰콤의 이동욱 부장은 “속도만을 좇는 ‘빨리빨리’ 문화보다 때로 쉬어 갈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아는 사람들이 타깃”이라고 말했다.식품회사도 슬로비족을 겨냥한 마케팅경쟁에서 빠질 수 없다. 건강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은 지양하고, 젊고 건강하며 느긋하게 사는 모습을 추구하는 슬로비족의 성향이 건강식품시장을 확대시켰다. 태평양에서 건강보조식품 마케팅을 담당하는 손희경 BM3팀 과장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무공해 채식, 자연식, 유기농 채소 등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사회 트렌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M&C리서치의 한기룡 사장은 “2000년부터 IMF 상처를 ‘치유’하자는 분위기와 함께 슬로비족이 사회적 트렌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특히 올 들어 이 같은 트렌드가 각종 광고에 반영되는 등 풍요와 여유를 추구하는 분위기와 함께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돋보기 슬로비족 & 주 5일 근무제슬로비족 “주5일 근무, 아이 좋아”주5일 근무제의 확산 속에서 슬로비족은 물 만난 물고기 격일 것이다.2001년 12월 한국관광연구원에서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주5일 근무제 도입시 여행과 관광은 4.9%에서 25.6%, 취미 및 교양활동은 4.9%에서 8.8%, 운동은 9.0%에서 12.8%로 증가할 것으로 나타났다.또 2001년 7월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주말 여가와 주5일 근무제 도입시 희망여가’를 조사한 결과 주말여행은 1.7%에서 21.5%로, 등산과 낚시는 2.3%에서 10.2%로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확대된 휴일은 가족의 행복과 여유로운 삶을 중시하는 슬로비족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대기업 전략기획본부에서 근무하는 손정훈씨(34)는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도 출근 전 중국어학원에 다니며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면서 “그러나 주말에는 반드시 여유를 찾는다”고 말했다. “토·일요일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뮤지컬을 보러 간다”고 그는 덧붙였다.제일기획에서 최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여가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5%에 이른다. 수입을 위해 일을 더 하기보다 여가시간을 더 갖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도 41%(부정은 22%)에 달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발맞춰 늘어가는 슬로비족의 특성을 보여준 자료인 셈이다.용어설명 슬로비족이란?슬로비(Slobbie)는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을 뜻하는 말. 여피(Yuppie)족 이후 1990년대 등장한 세대를 일컫는다. 삶의 여유, 안정적인 가정생활, 마음의 평화를 중시하는 부류. 키워드는 ‘느긋’, ‘마음’, ‘주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