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자금 유치 없이 420억원 부채 청산 … 고급화·제휴마케팅으로 정면승부 주효

“15분이면 될 것을….”11월13일 오전 눈가에 이슬이 맺힌 채 서울지방법원을 나선 윤영달 크라운베이커리 사장(57)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크라운베이커리에 대한 법원의 화의종결 판결은 단 15분 만에 끝났다.이날 저녁, 윤사장은 팀장급 이상 직원들과 함께 회사 인근 식당에서 조촐한 축하연을 가졌다.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진행된 축하연에서 윤사장은 “우리는 이제 새롭게 태어났다”며 “늘 과거의 어려움을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자”고 각오를 다졌다.크라운베이커리는 98년 1월, 화의신청(개시 98년 5월ㆍ8년) 뒤 4년 10개월 만에 원상태로 회복했다. 그것도 외부자금 유치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일어선 것이다. 순수한 영업이익으로 대부분의 빚을 청산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화의 당시 크라운베이커리의 부채는 580억원이었으나 지금은 이중 420억원을 갚았다.부동산매각대금 70억원 이외에 350억원은 순수하게 영업이익으로 갚은 것이다. 화의 중에도 오히려 외형은 더 커졌다. 98년 556개였던 가맹점은 지난 10월 말 현재 649개로 93개가 늘어났다. 매출액도 당시 960억원에서 올해 말 1,400억원(당기순이익 70억원)이 예상될 정도로 선전했다.크라운베이커리는 윤태현 창업주(99년 작고)가 1947년 설립한 영일당제과의 후신. 영일당제과는 56년 크라운제과로 상호를 변경하고 88년 크라운제과의 한 부서로 있던 크라운베이커리는 별도법인으로 독립했다.제과점업계 최초로 ‘베이커리’라는 상호를 쓸 정도로 크라운베이커리는 시장을 선도한 업체였다. 88년 제과업계 최초로 TV광고를 시작,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됐다. 92년 매출액 기준으로 업계 1위에 오른 뒤 화의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1위를 고수했다고 한다.그러나 크라운베이커리 역시 IMF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과잉투자가 문제였다. 당시 파리크라상, 뚜레쥬르 등 대기업 업체들이 줄줄이 뛰어들면서 이에 맞서 무리하게 시설을 확충했다. 또한 식자재 유통 등 신규사업에 뛰어들면서 부채가 산더미처럼 늘어났고, 결국 98년 1월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압박에 견디다 못해 화의를 신청한 것.그해 5월, 화의인가가 났지만 크라운베이커리는 거의 질식사 상태였다. 업계에서는 “크라운베이커리의 회생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화의 상태인데 누가 가맹점 가입을 하겠느냐는 것. 실제로 화의 이후 1년간 최악의 위기를 여럿차례 넘겼다. 98년 매출은 97년보다 25%나 떨어졌다. 가맹점들도 흔들렸다.한 달에 40여개가 그만두거나 다른 브랜드로 바꿨다. 경쟁업체들이 전국의 가맹점으로 가맹점 개설안내서를 수시로 보내왔다. 납품업체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쳐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된 적도 많았고 원재료 공급업체들이 이미 납품했던 물량까지 다시 싣고 가는 사태가 연출됐다.크라운베이커리가 ‘회생하지 못할 것’이라는 업계의 예측을 비웃으며 되살아난 비결은 뭘까.먼저 가맹점의 사기진작에 총력전을 펼친 것이 성공했다. 화의 초기처럼 매달 40개의 가맹점이 이탈할 경우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어떻게든 흔들리는 가맹점주들에게 신뢰를 안겨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익성을 높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크라운베이커리는 마진율이 낮은 공장제품을 줄이고 즉석제품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화의 초기 매달 가맹점 40개 이탈완제품의 경우 가맹점의 마진율은 30% 정도에 불과하지만 반숙상태의 제품은 40~45% 수준으로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한 것. 이전에 10%에 불과했던 반숙제품을 40%까지 늘렸다. 결국 가맹점의 매출마진이 7~10% 정도 좋아지면서 더 이상의 추가이탈을 막을 수 있었다.베이킹 마스터(BM) 제도를 도입한 것도 가맹점의 수익성을 높이고 신규가맹점을 늘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BM은 제과ㆍ제빵자격증을 가진 160여명의 30~40대 주부들로 구성됐는데 가맹점주 교육 및 매장관리를 담당시켰다. 이들은 제빵기술이 없거나 경험이 부족한 가맹점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화의 이후 예상을 깨고 고급화 전략을 구사한 것도 주효했다. 제품질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2001년 업계 최초로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제도) 인증과 함께 ISO 9001 인증(품질경영 구축을 위해 ISO에서 제정한 국제규격)을 획득했다. 이런 노력으로 2001년 천연유산균을 이용한 천연발효빵을 출시한 데 이어 지난 6월 농협과 손잡고 현미식빵을 개발했다.과감한 제품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도 빛을 봤다. 400개를 270개로 줄여 집중관리 했다. 상류층을 겨냥한 고급제품도 잇달아 출시했다. 무스 및 치즈 케이크 등이 그것이다. 빵이름도 ‘클래식으로’ ‘전원 속으로’ 등 고급스럽게 지었다.튀는 아이디어 상품으로 차별화도 꾀했다. 모바일 타입 생크림 케이크 ‘얌’을 출시하고 케이크띠를 벗길 때 생크림이 묻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얇은 반죽으로 띠를 두른 ‘크레따뻬’도 내놓았다.이와 함께 제휴 마케팅에 총력을 쏟은 것도 성공했다. 가령 KT의 전국 전화국에서 케이크 주문을 받고 크라운베이커리가 배달해주는 제휴를 맺은 것이 좋은 사례다. 이 사업으로 매출이 7~8% 늘어났다. SK의 OK캐쉬백과 제휴, 월 7억~8억원의 매출을 더 올린 것을 비롯해 LG이숍, 삼성몰 등 각종 쇼핑몰을 통한 케이크 배달 서비스로 케이크 매출액이 20% 이상 늘어났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윤사장과 직원들의 피나는 노력도 빠트릴 수 없는 성공요인 중의 하나다.윤사장은 98년 초 화의 뒤 즐기던 골프도 끊고 1년여간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현장을 뛰어다녔다. 1주일에 3~4일은 가맹점을 방문하고 그들이 느끼는 문제점을 직접 듣고 해결책을 모색했다.직원들도 적극 동조했다. 1,200명 중 400명이 회사를 떠났지만 노사마찰이 없었다. 각종 특판팀을 구성해 적극 마케팅에 나섰다. 김옥중 상무는 “아침에 식빵을 배달해주는 ‘아침 배달팀’, 토스터회사 영업팀과 함께 주택가를 돌며 영업활동을 한 ‘빵 굽는 팀’ 등이 현장을 누볐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특히 98년 4월 직원들이 자신들의 피와 땀이 뭉친 1년분 상여금을 전부 회사에 반납해 모은 돈으로 대대적인 TV광고를 하기도 했다.과거 제과점업계의 왕관자리를 다퉜던 고려당, 신라명과 등이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크라운베이커리의 화의 조기 종결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