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몰라도 한국의 여성들에게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 네임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회사가 하나 있다. 여성용 내의류가 주력제품인 ‘와코루’다.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다나카 고이치씨를 배출한 시마즈제작소가 교토에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기업인 것처럼 와코루 역시 교토에서 첫 간판을 올린 회사다. 일본의 여성용 내의류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와코루는 적어도 여성 소비자들에게 긴 설명이 필요 없다.품질, 상품개발력에서 경쟁업체들을 언제나 한발 앞서 가며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는 이 회사의 이름 석자는 여성 내의의 대명사로 통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코루’라는 회사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 회사가 마케팅에 특히 강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와코루의 속사정에 밝은 일본전문가들은 이 회사와 경쟁사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와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개발력에 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여성용 내의를 만드는 회사답게 고객인 여성들의 신체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한편 고객들조차 느끼지 못했던 니즈(Needs)를 상품개발로 연결하는 능력에서 와코루를 능가할 경쟁업체가 없었다는 진단이다.지난 7월 도쿄의 유명 백화점 여성 내의류 매장들에서는 뜻하지 않은 이변이 하나 일어났다. 매장 한 구석이 붉은 컬러로 채워지는가 했더니 빨간색 브래지어를 착용한 여성모델의 대형 패널이 진열대 앞을 장식했다.이를 지켜보는 고객들의 시선에서는 묘한 호기심이 읽혀졌고, 담당직원들의 표정에는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학생들 같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날 매장에 걸린 빨간색 브래지어는 와코루의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는 신호탄이었다.빨간색 브래지어를 만들지도, 팔아보지도 않은 경험과 통념을 깨고 발상의 전환에 앞장섰음을 알리는 증거였다.일본의 여성 내의류 시장에서 붉은색은 제조업체와 소비자들 모두에게 찬밥 대접을 받아온 컬러였다. 메이커들은 붉은색 제품을 많이 만들려 하지도 않았고 튀는 색깔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소비자들 역시 별 눈길을 주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브래지어의 경우는 사정이 더 심했다. 만들어도 팔리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느 업체도 쉽사리 빨간색에 도전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성 내의류 시장에서 ‘간판’으로 군림해온 와코루의 계산은 달랐다. 경쟁업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빨간색을 망설이지 않고 택했다. 튀는 색깔로 승부한다는 전략이었다.그러나 와코루가 ‘샤키토브라’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빨간색 신제품을 통해 진짜로 노린 것은 컬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굳게 지켜온 브래지어의 제품 컨셉에서 벗어나 경쟁업체들이 넘볼 수 없는 신개념의 컨셉으로 방향을 틀겠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여성 내의류 업체가 브래지어를 만들 때 철석같이 지켜 왔던 제품 컨셉은 가슴을 받쳐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고객들도 이 컨셉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요.”이 회사의 세키구치 미쓰루 과장에 따르면 가슴을 받쳐준다는 컨셉은 와코루가 지난 92년 ‘굿 업 브라’라는 이름의 제품을 발매할 때부터 들고 나온 것이었다. 이 컨셉이 먹혀들었는지 몰라도 ‘굿 업 브라’는 연간 10여만장만 팔려도 대성공이라는 브래지어 시장에서 누계판매량이 1,000만장을 넘었을 정도로 초대형 홈런을 날렸다.그렇지만 가슴을 받쳐준다는 컨셉은 다른 동종 메이커들이 제품개발 과정에서 너도나도 따라하는 이정표가 됐다. 유사 제품을 내놓고 와코루 추격에 나선 메이커들도 모두 가슴을 받쳐준다는 컨셉을 첫마디에 올렸다.와코루가 선구자 노릇을 했던 컨셉은 갈수록 빛이 바랬고, 이에 비례해 와코루의 브랜드 네임이 갖는 매력도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렸다. 일선 매장에서는 와코루를 찾다가 값싼 유사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전체 시장은 커지고, 경쟁업체들의 몫은 늘어나도 99년부터 와코루의 매출은 내리막길을 걷는 분위기가 역력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생각해낸 것이 신개념의 컨셉, 즉 아름다운 자세를 지켜주고 가슴을 크게 보이도록 해준다는 것이었다. 와코루는 신개념 컨셉을 바탕으로 상품화에 전력투구한 끝에 샤키토브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서 여기에 튀는 색깔을 입혀 지난 7월부터 시장개척에 나선 것이다.인간과학연 설립, 데이터 과학적 분석여성 내의류 업계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 와코루의 최대 강점은 수십년간 축적해 온 방대한 양의 신체 데이터에 뿌리하고 있다. 와코루는 ‘고객을 알지 못하면 고객이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창업자 고 쓰카모토 고이치씨의 지론에 따라 지난 64년 인간과학연구소를 세웠다.이와 함께 고객인 여성들의 체형 데이터를 낱낱이 조사, 수집하고 저장하는 작업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 왔다. 와코루가 연구소를 세우기 전까지 인간의 체형을 측정하는 장치와 상세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데이터 축적 작업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내다본 것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이 회사의 인간과학연구소는 3만5,000명에 달하는 여성들의 체형 데이터를 축적해 놓고 있으며, 현재도 매년 500~1,000명의 여성 체형을 측정하고 있다. 체형 측정 작업도 정밀하고 꼼꼼하기 그지없다. 한 사람의 여성에 대해 수작업 계측, 기계를 이용한 3차원의 체형 측정 및 신체의 선 측정에 이르기까지 최대 154개소를 약 2시간에 걸쳐 재고 또 잰다.이중 200명은 25년째 와코루의 신체 측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체형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한 장기 포석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신체 측정에는 매년 1,000만엔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고 있으며 한국, 태국, 중국 및 대만에서도 실시하고 있다. 외국소비자들에게도 정확하고 잘 맞는 제품을 공급하기 위한 글로벌 전략의 하나다.수십년간 쌓여진 방대한 데이터와 이를 조금도 헛되지 않게 하려는 빈틈없는 노력은 와코루를 1등 회사의 반석에 올려놓으며 수많은 히트상품을 안겨주었다.예컨대 지난 81년에 발매해 300만장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세이프 업 거들’과 86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고고치E’가 대표적 케이스다. 고고치E는 형상기억합금을 와이어에 사용한 브래지어로 90년대 이전 제품들 중 가장 각광받으며 와코루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이번에 등장한 샤키토브라 역시 데이터와 이를 바탕으로 한 개발력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샤키토브라의 개발주역 중 한 명인 고야마 나오토씨는 “3만5,000여명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자세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며 “이에 착안해 ‘자세를 바로 하면 몸의 균형이 좋게 보인다’는 것을 컨셉으로 삼게 됐다”고 털어놓았다.그는 10년 전의 20대 여성은 고양이처럼 등이 굽은 사람의 비율이 9% 정도였으나 현재 13%까지 높아졌다며 시장에는 자세를 바로 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같은 계산이 주효했는지 샤키토브라는 기대 이상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8월 첫째주에만 도쿄지역의 160개 매장에서만 1만장이 팔려나간 데 이어 연말까지의 판매목표도 70만장에서 80만장으로 상향조정했다. 회사측은 지금까지의 히트상품을 능가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며 빅 히트 기대감마저 감추지 않고 있다.“경쟁사들이 쫓아올 수 없는 상품을 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이 회사 임원의 말에는 경쟁업체들이 추격해 오면 와코루는 또 한 걸음 달아날 것이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어 있다.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