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사진·57)은 요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 지난 9월 친형인 고 박정구 회장의 뒤를 이어 대권을 물려받은 뒤 100일이 지났지만 시급하게 풀어야 할 난제가 수북이 쌓여 있기 때문. 특히 취임 초기 약속했던 금호타이어의 연내 매각 등 구조조정 및 신사업 진출 계획이 잇따라 어긋나면서 속만 끓이고 있는 상황이다.박회장이 애를 태우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룹의 구조조정 성패를 좌우할 금호타이어 매각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고 자꾸만 꼬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우선협상대상자인 칼라일ㆍJP모건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당시만 해도 8월 말이면 본 계약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박회장도 연초 “늦어도 8월 말까지 성사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지난 8월 말 양측은 끝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11월까지 협상기간을 연장했다.박회장은 지난 9월 초 그룹회장 자격으로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큰 틀에서의 합의는 끝났다”며 연내 매각을 공약했지만 이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가격문제를 이유로 ‘결렬’을 선언하고 협상을 중단하고 말았다. 결렬 이후 재빠르게 군인공제회와 MOU를 체결하고 협상에 나섰지만 연내 타결이 어렵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견해다.박회장 입장에서는 그룹회장 취임일성으로 밝힌 ‘연내 구조조정 완료’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게다가 금호타이어 매각 문제가 자꾸만 꼬이자 채권단 일각에서는 “(박회장이) 매각할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마저 보내고 있어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가 됐다.매각은 yes, 덤핑은 no박회장은 정말 매각의지가 없는걸까. 이는 그룹의 현 처지와 금호타이어가 그룹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금호는 IMF 직후 부채비율이 1,019%에 달할 정도로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시달렸다. 발등까지 번진 불을 끄기 위해 서둘러 금호석유화학 카본블랙사업부문, 금호산업 중국 톈진 금호타이어공장 등을 매각하는 등 지속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결과 2001년 부채비율을 283%까지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문제는 금호의 구조조정이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2001년 말 기준 14개 계열사의 총차입금이 4조9,000억원으로 재무구조가 여전히 불안하다. 이중 그룹의 단기차입금은 연결재무제표상 약 1조7,132억원에 달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제2금융권에서 상환을 위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여기에다 금호의 주력 계열사들이 금호타이어를 매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도 아니다. 금호석유화학은 세계 합성고무 시장이 저성장 추이를 보임에 따라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2000년에 242억원, 2001년 1,020억원 등 2년 연속 적자를 낸 것이 이를 방증한다.금호개발도 2001년 약 1,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고, 금호생명 역시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부채질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올해 환차익 등으로 흑자를 봤지만 2001년 약 2,724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그룹의 전체적인 적자규모 확대에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현재 그룹의 주력이자 타이어, 건설, 운송부문 등을 거느리고 있는 금호산업도 2002년 6월 말 현재 차입금이 총 1조6,307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외부차입금 비중이 과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금호산업이 사채발행을 위해 작성한 사업설명서에는 “일부 계열사들의 높은 재무위험이 계열사간의 재무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금호타이어 매각은 그룹의 유동성문제를 해결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금호산업 타이어부문은 2001년 매출 1조4,100억원, 영업이익 연간 1,000억원대로 그룹이 자랑하는 알토란같은 사업체다. 국내 타이어시장에서 시장점유율 45%로 한국타이어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세계 타이어 시장에서도 10위권(시장점유율 1.7%)에 포함돼 있을 정도다. 채권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금호타이어 매각대금은 1조5,000억~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금호타이어를 매각할 경우 약 300%에 달하는 그룹 부채비율을 200%대 안팎으로 끌어내릴 것으로 예상된다.게다가 금호타이어뿐만 아니라 올해 예정됐던 기내식사업부, 도심공항터미널 지분 매각 등 나머지 구조조정 작업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처럼 금호타이어 매각 등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미흡할 경우 채권단의 강력한 제재도 우려된다.결국 박회장은 시간에 쫓겨 싼값에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끌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이런 와중에 최근 미국 3대 항공사 중 하나인 유나이티드항공의 파산으로 박회장의 고민거리는 하나 더 늘었다. 박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고 키운 주역답게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나항공을 국제적인 항공사로 키우기 위해 박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것이 바로 ‘스타동맹’ 가입이다. 이로 인해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공동마케팅을 통해 노선수익만 연간 430억원 가량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그러나 내년 1분기 정식 가입을 눈앞에 두고 스타동맹 가입 항공사들의 총여객수입에서 27%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나이티드항공이 파산한 것이다.세계 항공업계에서는 유나이티드의 파산에 따라 동맹항공사들이 적잖은 파장에 시달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피해는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상당한 핸디캡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홍석진 교통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유나이티드항공을 이용한 미국 국내 노선의 확대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경쟁사인 대한항공의 ‘스카이동맹’에 맞서면서 수익성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입한‘스타동맹’이 첫걸음부터 어긋난 것은 박회장의 마음을 더욱 찜찜하게 하는 대목이다.박회장의 꿈은 2010년까지 국내 5대 그룹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항공과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생명공학, 신소재, 물류산업 등 신사업에 진출 시너지를 극대화하겠다는 복안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사업진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룹 관계자들은 “신사업은 일단 구조조정이 말끔하게 완료된 이후 생각할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박회장이 언제쯤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고 5대그룹에 진입할 토대를 마련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