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은 시대의 거울이다. 소비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반사경이다. 절대다수의 상품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장의 현실 속에서 ‘히트’라는 월계관을 한 번이라도 목에 걸어본 상품은 시대흐름을 보여주는 기록성에서 일단 높은 점수를 받는다.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제조업이 산업의 뿌리 역할을 떠맡아 온데다 기업마다 신제품 개발 경쟁에 목을 걸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히트상품의 가치와 역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크고 유별나다.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도 보통이 아니다. 해마다 각종 상품정보전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신문ㆍ방송도 연말이 되면 시장을 주름잡고 소비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상품들을 들춰내기 바쁘다.그러나 <니혼게이자이신문 designtimesp=23343>이 최근 발표한 2002년 히트상품 리스트에서는 예년과 색다른 변화가 발견됐다. 최고 히트상품에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거나 입는 물건이 아닌 건물이 올랐으며, 2002한ㆍ일월드컵, 인기 여자배우, 중국의 상하이 등과 같은 고유명사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장기불황에 발목이 잡힌 시장 현실을 반영하듯 소비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초대형 대박상품의 수는 줄어든 대신 국가적 이벤트와 유명 연예인, 해외여행 등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몰고 다녔음을 보여주는 셈이다.2002년 소비키워드 ‘거리’와 ‘커뮤니케이션’스모(일본씨름)의 대전 방식을 본떠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모두 20개를 히트상품으로 발표한 이 신문은 동군의 최고 히트상품으로 미쓰비시그룹이 지난 9월 완공한 마루빌딩을 꼽았다. 서군에서는 사진을 전송할 수 있도록 초소형 카메라가 부착된 휴대전화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2~10위까지는 동군의 경우 2002한ㆍ일월드컵, PDP TV, 기쿠가와 레이(도쿄대학 출신의 인기 여자배우), 가오의 저콜레스테롤 마요네즈, 수이카(JR동일본의 비접촉식 열차승차카드), 사누키 우동, 미즈노의 연식야구배트(비온드 맥스), 닛산과 도요타의 소형승용차(마치ㆍ이스트), 50~60년대풍 가구 등이 차례로 히트상품으로 선정됐다.이와 달리 서군에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 상하이, 장수건강법, 바우링걸(애완견 음성번역기), 산요전기의 위로 뚜껑을 열고 닫는 드럼세탁기, 삼각형 주먹밥, 초염가 운동화(히라키의 켤레당 180엔짜리), 소니의 본체, 화면 일체형 컴퓨터(바이오W), 대형 괘종시계 등이 각각 이름을 올렸다.신문은 동ㆍ서군에 나타난 히트상품의 면면을 종합해 볼 때 2002년 소비의 키워드는 ‘거리’와 ‘커뮤니케이션’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지갑을 닫은 소비자들이 눈에 보이는 값비싼 상품을 덜컹 사기보다 새로 들어서는 초현대식 빌딩을 돈이 들지 않는 ‘만남의 장’ ‘대화의 공간’으로 삼으며 앞다퉈 몰려드는 신풍속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단순히 목소리만 보내고 받던 휴대전화의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과 영상을 보내고 받는 도구로 휴대전화의 사용범위가 넓어진 것 역시 소비자들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음을 보여준다고 신문은 덧붙였다.먹고 마시는 상품이 아니면서도 최고 히트상품의 자리에 올라 주목의 대상이 된 마루빌딩은 미쓰비시그룹이 도쿄역 앞 재개발사업의 핵심 프로젝트로 재건축해 오픈한 초현대식 고층 인텔리전트 건물이다.이 빌딩은 일본의 심장부 도쿄의 현관과도 같은 위치에 랜드 마크처럼 우뚝 세워져 오픈 전부터 일본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초일류 기업의 사무실과 고가 명품점들을 다수 입주시켜 이름값을 높인 이 빌딩은 지난 9월 말 오픈 후 불과 3개월간 720만명 이상의 사람이 다녀가 또 한 번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다.빌딩 주인 미쓰비시지쇼는 이 기간에 입주 상점들의 매출이 약 91억엔에 달해 놀랄 만한 실적이었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빌딩 컨셉을 단순한 오피스 건물이라기보다 ‘사람과 기업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공간’으로 내세운 미쓰비시 지쇼의 전략이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한ㆍ일월드컵은 일본은 16강 진출에 머물렀지만 스포츠용품, 대형 TV, 식음료 등에 상당한 매출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얼어붙었던 일반인들의 소비심리를 녹이는 데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특히 월드컵을 계기로 수요가 본격적으로 불붙은 PDP TV는 지난 9월 말까지의 출하대수가 전년 동기의 3.9배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가전업계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닛산이 모델을 교체해 지난 3월부터 투입한 소형승용차 ‘마치’는 ‘팔리는 자동차가 닛산에는 없다’는 세간의 혹평을 뒤집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가 닛산 재건의 견인차가 됐다.서군의 경우 상하이는 거대 소비지로 부상한 도시적 매력에다 최근 2~3년간 부쩍 고조된 일본 내의 중국 열풍을 발판으로 젊은 소비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다. 신문은 여성 여행객들이 특히 상하이를 많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삼각형 주먹밥(오니기리)은 재료를 고급화한 일부 업체들의 전략이 소비자들의 구매욕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분석됐다.최고급 쌀과 고품질 식자재만을 사용한 주먹밥체인점이 등장하면서 중년 여성들로까지 고객층이 넓어졌다고 신문은 진단했다. 신문은 또 일부 패스트푸드전문점에서는 매출 공백을 메워줄 히든카드 역할도 맡고 있다면서 삼각형 주먹밥이 ‘일본발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로 자리를 굳힐 것이라고 덧붙였다.애완견 음성변역기 ‘바우링걸’ 인기짱고베에 본사를 둔 히라키가 야심작으로 투입한 켤레당 180엔짜리 운동화는 값의 한계에 대한 업계의 기존 인식을 뛰어넘은 상품으로 평가받았다. 전문가들은 1,000엔 안팎의 제품에 비해 품질에서 손색이 거의 없으면서도 가격경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운동화야말로 중국발 염가태풍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니혼게이자이신문 designtimesp=23382>이 앞으로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히트상품 중 하나는 단연 완구메이커 다카라가 내놓은 애완견 음성번역기 ‘바우링걸’이다. 다카라가 휴대전화 콘텐츠업체인 ‘인덱스’와 일본음향연구소 및 수의사들과 함께 손잡고 개발한 이 상품은 일본 제조업체들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역작이라고 신문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바우링걸은 지난 9월 첫 발매를 시작한 직후부터 주문이 쇄도, 다카라가 연말까지의 판매목표를 당초 예정의 9만개에서 15만개로 부랴부랴 늘려 잡았을 정도다. 2003년에는 일본시장에서만 60만개를 파는 것을 비롯해 한국 20만개 등 해외시장에서 140만개를 팔 수 있을 것으로 회사측은 낙관하고 있다. 기쁨, 슬픔, 위협 등 애완견의 6가지 감정을 모두 200개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바우 링걸은 미국 <타임 designtimesp=23385>지에 의해 2002년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됐을 만큼 높은 상품성을 인정받아 앞으로의 대박 가능성이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다.한편 이 상품은 막대한 수익이 예고된 빅 히트상품이면서도 3년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에 초스피드로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탄생과정과 개발 주역에 대한 일본언론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닛케이비즈니스 designtimesp=23388>는 최신호에서 개발 주역을 맡았던 이 회사의 가지다 마사히코 캐릭터 사업부 차장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영업맨에서 개발인력으로 변신한 그가 3년 만에 엄청난 신화를 쌓게 됐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어린시절 개에게 두 번이나 물린 경험을 갖고 있는 그는 강아지를 매우 싫어했지만 히트상품을 만들어내 회사를 살리라는 사장의 특명을 받고 할 수 없이 상품개발에 전력투구한 것으로 알려졌다.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