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매장 겸한 사무실서 첫출발, 패션주얼 리 등 세련된 디자인으로 기반 닦아

그의 꿈은 담배파이프를 물고 갑판에 서 있는 ‘마도로스’였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그는 외항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마도로스의 꿈으로 꽉 차 있었다.광운전자공고를 다닐 때까지도 마도로스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찾아온 가난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행로를 걷게 했다. ‘마도로스의 꿈’을 접던 그날, 그는 무거운 마음에 기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인천으로 갔다. 푸른바다를 향해 가슴을 풀어헤치고 눈물을 흘렸다.손한웅 KS주얼리 대표(50). 국내 귀금속업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기업인이다. 1979년 초로 기억된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전국의 귀금속 소매상을 찾아다니며 금합금재료(일명 알로이)를 팔았다.“하나 팔면 2,000원 남았는데 허탕치는 날이 더 많아 재미가 없었어요.” 돈벌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큐빅에도 손을 댔다. 시작은 생각보다 좋았다. 서울 남대문에 위치한 수출입업체인 삼성귀금속에 큐빅을 공급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가공업체들로부터 납품받아 공급하는 중간업자 노릇을 했다. 하지만 조악한 품질로 반품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직접 생산하기로 하고 서울 공릉동 처갓집 지하에 10평 남짓한 공장을 차렸다.“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지요.” 가동에 들어간 지 달포쯤 된 어느날, 납품업체였던 삼성귀금속이 전북 이리로 이전한 것이다.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나뿐이었던 거래처는 사라졌고, 재고는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고….”이런저런 고민에 쌓여 있던 손대표는 거래중단 사태를 소비시장 개척을 통해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납품업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도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해서 금석이라는 회사를 1980년 설립했다. 금석은 훗날 수출을 하면서 KS주얼리로 변경됐다. 명동에 매장을 겸한 사무실을 내고 은에 큐빅을 박은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제품을 들고 전국을 누볐는데도 힘든 줄 몰랐어요.”장사가 잘되면서 종로, 종묘공원으로 공장과 사무실을 확장해 나갔다. 10k(순금함량 41.7%)와 14k(58.5%)의 반지, 귀고리, 목걸이 등 생산제품도 늘려나갔다. “당시 금 함량을 채우지 않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저는 금 함량을 채운 정품만을 고집했습니다.”에피소드 하나. 공장 옆에 살고 있던 칠순을 넘긴 노인이 밤마다 공장을 찾아왔다. 망치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며 항의를 해온 것. 이에 손대표는 매일 밤 노인의 집에 찾아가 어깨를 주물러주는 등 자식 노릇을 했다. 이렇게 하면서 물량을 맞출 수가 있었다.1985년은 회사가 ‘임대 딱지’를 뗀 의미 있는 해였다. 휘경동에 대지 100평 건평 40평 규모의 2층짜리 건물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KS주얼리는 휘경동 시대를 열면서 귀금속업계의 ‘맏형’ 역할을 해나갔다. 귀금속업계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개념의 마케팅을 접목했다. 다름 아닌 대리점 및 직영점의 지방시대를 열었다. 서울 중심의 마케팅을 지방으로 확대시켜 나갈 생각에서였다.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늘려나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방에서는 교통불편으로 지역에서 만든 제품을 주로 팔았다.“세련된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지역에서의 반응이 좋아지자 다른 업체들도 우리 회사를 따라하기 시작하더군요.”96년부터 수출 시작국내 귀금속 시장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젊은층이 귀금속을 하나의 패션상품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는 이를 반영, 젊은 감각을 입힌 패션주얼리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주얼리 시장도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당시 국내 귀금속 시장의 중심인 서울 종로에만 200개(85년까지 40여곳)가 넘는 업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물론 부작용도 나타났다. 업체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업계가 부침에 시달린 것. 원가에도 못미치게 팔아 제살깎기 경쟁을 벌였다. 손대표는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해외시장을 뚫기로 작심했다.손대표에게 뜻밖의 행운이 다가왔다. 96년 봄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바이어가 회사를 방문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주얼리업계를 돌아보는 와중에 지인이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해 들렀다는 것이다. 1시간 남짓 상담을 했을까. 바이어는 그 자리에서 10만달러어치를 주문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총 80만달러를 수출했다.이듬해에는 일본수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바이어를 만나 디자인 샘플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인 반지, 목걸이가 아니라 동물모양 등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난해한 형태의 귀금속들이었다. 만들면서 숱한 실패를 거듭했고 납품한 제품은 반품되기 일쑤였다. “기술력을 쌓는 길밖에 없더군요. 밤잠을 설치며 개발실에서 살았죠.”2개월 만에 일본 바이어의 눈에 들었다. 이렇게 해서 98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200만달러 이상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KS주얼리는 외환위기로 국내 귀금속 시장이 침몰해가자 수출을 더욱 강화했다. 사실상 손대표 혼자서 하던 수출업무를 무역팀을 만들어 체계화시켰다. 또 해외박람회에도 활발하게 참가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미국, 터키, 바레인, 러시아 등 수출국가를 10여개국으로 늘렸다.수출도 매년 늘어 98년 400만달러에서 2001년 1,500만달러, 지난해는 1,800만달러를 달성했다. 손대표는 “올해는 국내외 상황이 어렵지만 신규 시장개척을 통해 수출 2,000만달러를 달성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IMF 때 맞은 부도여파를 슬기롭게 이겨낸 것이 수출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됐다”고 덧붙였다.KS주얼리는 올해 키르기스탄에 진출,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기존 브랜드 ‘라노비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시장 활성화도 해나갈 계획이다.지난해부터 한국귀금속가공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손대표는 귀금속산업 발전을 위한 대정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오는 7월1일부터 금지금(골드바)에 대해 부가세가 면제되면 귀금속업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