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회장 ‘해외진출’ 강력 주문…러시아·중국 발판 삼아 ‘세계기업’ 변신 꾀해

1994년 11월25일 저녁,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롯데리아 중국 1호점 개점을 축하하는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신격호 롯데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이 중국 정부요인 등 300여명의 하객을 직접 맞았다.베이징 천안문광장 건너편에 자리잡은 1호점은 연건평 218평, 총 252석을 갖춘 4층 건물. 롯데는 이후 상하이와 하얼빈 등 9호점까지 잇달아 매장을 내는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다.그로부터 9년 후인 2003년 2월. 롯데리아 중국 매장은 2개로 겨우 1개만 늘어났다. 당초 30~40개로 늘리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널드와 KFC 등에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적자 매장의 문을 닫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롯데리아는 대책팀을 중국에 파견, 진출전략을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는 실정이다.롯데리아의 중국진출에서 ‘뼈아픈’ 실패를 맛본 롯데는 이후 해외진출에 주춤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러다 보니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등 국내에서는 업계를 주름잡는 기업들이 즐비하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이름값’을 하는 계열사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롯데는 지난해 약 19조원의 매출을 올려 재계 10위권에 속했지만, 수출 또는 해외법인에서 거둔 ‘글로벌 매출’(롯데상사 포함)은 전체 매출액의 2~3%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업종 특성상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한진, 두산, 한화 등 10대 그룹 중 가장 낮은 수치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를 맞아 롯데는 단지 국내 1등 기업으로 만족하는 것일까.해외진출 향후 전략은‘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것이 요즘 ‘해외진출’과 관련한 롯데 분위기다. 신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제 활발한 해외진출을 통해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다져야 한다”며 ‘글로벌 경영’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초석은 어떻게 다진다는 것일까.첫 삽은 지난해 10월24일 모스크바에서 떴다. 그룹에서 총 4억달러(약 5,000억원)를 투자해 대규모 ‘롯데센터’를 세우는 공사를 시작한 것. 크렘린궁에서 불과 1.5㎞ 떨어진 곳에 건설 중인 이 센터는 90년대 중반부터 추진해 온 대규모 프로젝트. 6,000여평의 부지에 1단계로 23층 규모의 백화점 및 인텔리전트 빌딩을 짓고, 2단계로 9층 규모의 5성급 호텔 등을 짓는 등 연면적 4만평 규모의 복합건물을 건립한다.롯데는 지난 88서울올림픽 당시 구소련 선수단을 롯데쇼핑이 공식 지원한 것을 계기로 현지에서 상품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러시아와 꾸준한 우호관계를 맺어왔다. 롯데 관계자는 “모스크바 롯데센터의 성패가 롯데의 해외진출의 폭을 좌우할 것”이라고 귀띔했다.‘모스크바 프로젝트’와 함께 해외진출 과정에서 핵심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중국공략’이다. ‘떠오르는 시장’ 중국에 롯데마트, 백화점, 롯데월드 등을 차례로 내보낸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외부 컨설팅기관에 용역을 의뢰해 놓은 상태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대략적인 프로그램을 보면 먼저 ‘첨병’으로 롯데마트를 진출시켜 사업타당성을 충분히 검토한 뒤 롯데백화점이 뒤따라 들어간다는 것. 롯데백화점 진출과 함께 롯데월드가 들어가 롯데의 아성을 구축하겠다는 복안이다.‘계열사연합군’이 러시아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롯데리아 등 ‘국내 1위 기업’들이 막강한 국내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유격전’을 벌인다는 전략이다. 이들은 주로 중국과 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에서 거점 확보에 나선다.제과업계 국내 1위인 롯데제과는 중국 비중을 차츰 늘려나갈 예정이다. 롯데제과의 2002년 매출은 1조800억원(회사 추정). 이중 해외수출은 3,000만달러(약 360억원) 정도에 그쳤다.롯데제과는 90년대 일본롯데와 합작 형태로 해외진출을 도모했다. 지난 94년부터 96년까지 매년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 현지공장을 세운 것. 그러나 일본롯데가 5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다.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비로소 독자노선으로 돌아섰다. 2001년 중국 베이징 인근에 700만달러를 투자해 현지공장을 설립하고 초코파이와 껌 등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도 역시 베이징 인근에 ‘자일리톨 껌’ 공장을 지으며, 본격적인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음료업계 국내 1위인 롯데칠성음료는 90년대 초 중국진출을 추진하다가 중단한 이후 직접 진출은 애써 피하고 있다. 코카콜라, 펩시 등 세계적인 음료업체와 맞서봐야 별로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수출은 꾸준히 늘렸다. 2000년 380만달러, 2001년 700만달러, 2002년 1,050만달러로 덩치를 키웠다.이중 자사브랜드는 80% 정도로 사이다, 스카치블루, 밀키스 등이 주력 수출품이다. 주로 동남아, 중국, 일본, 중동 등지에서 성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 하지만 회사 총매출에서 차지하는 수출비중은 여전히 미약하다. 2002년 매출액 약 1조1,000억원(추정) 중 수출비중은 1% 정도에 불과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앞으로도 무리한 진출은 삼가고 안정적인 루트를 찾겠다”고 밝혔다.누가 주도하나그럼 롯데그룹의 해외사업은 누가 주도할까. 일각에서는 한국롯데의 후계자인 신동빈 부회장을 꼽는다. 신부회장은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일본과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까닭에 국제경제에 대한 안목이 높고, 기회를 포착해 이를 기업경영에 반영하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이다.따라서 90년대 중반부터 신규사업을 지휘하고 있는 신부회장과 그가 직접 만든 국제부의 황각규 이사(국제사업팀장)가 해외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신부회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재계 관계자는 “신규사업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별도의 팀을 가동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롯데측은 “신회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이를 부인했다.롯데그룹의 공식적인 해외사업 루트는 ‘신회장 → 롯데호텔 경영관리본부 → 해당 계열사’로 이어진다. 경영관리본부는 최근모스크바 롯데센터나 중국진출 같은 그룹 차원의 해외진출의 조감도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롯데 관계자는 “해외진출시 필요에 따라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사안별로 대처한다”고 덧붙였다.하지만 재계는 롯데가 그동안 보수성향이 강해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롯데가 이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뚫고 해외시장에서도 어떻게 ‘기지개’를 켤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