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로보트보일러 부도 나자 직원들과 십 시일반으로 회사설립… 지난해 순익 3억원 올려

척척보일러의 박창기 사장(53ㆍ사진)은 청계천 판잣집에서 건설잡부들과 생활을 하며 보낸 경험이 있다. 전남 진도가 고향으로 목포 해양고등전문학교(전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그는 지난 1976년 서울로 상경한다.직장을 잡기 위해 무작정 올라왔다. 막상 서울에 왔지만 잠잘 곳을 정하기도 힘들었다. 빈주머니에,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형편에 하숙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그는 동대문에 있는 여인숙 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청계천 건설현장에서의 막노동. 한여름 푹푹 찌는 뙤약볕 아래 찜통을 멨다. “어깨는 까지고 무릎은 멍들고 … 씻을 물도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척박한 환경에서도 박사장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대학까지 졸업한 놈이 이런 일을 하느냐”는 동료들의 말에도 수치심보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서 밤에는 책과 씨름하며 목표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꿈을 키워나갔다.1년 후 그는 서통에 당당하게 입사, 1985년까지 건전지로 유명한 서통맨으로 탄탄한 실무능력을 쌓아갔다. 박사장이 보일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통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기 시작하던 1985년에 심야 전기보일러ㆍ온수기 전문업체인 한진기계로 옮기면서부터다.그는 “당시 한진기계가 이 분야 국내 첫 업체로 한 번 새로운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옮겼다”고 배경설명을 했다. 그는 관리사원으로 옮겼지만 현장에서 기술도 익혔다. 이곳에서 보일러 기술을 익힌 그는 1993년 척척보일러의 전신인 로보트보일러 생산과장으로 들어왔다.당시 로보트보일러의 성승석 사장의 구애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로보트보일러에 들인 발걸음이 박사장을 한 편의 인생드라마 주인공으로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박사장이 로보트보일러에 들어온 지 4년 만인 1997년 3월 회사는 부도가 났다. 당시 그는 환경사업담담 본부장(이사)을 맡고 있었다. “회사가 중국에 보일러공장을 짓고 호텔사업까지 하는 등 무리한 투자를 한 것이 자금압박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부도가 난 것입니다.”연간 4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알찬 회사가 부도를 내자 직원들은 우왕좌왕하고 주요 경영진은 ‘제살궁리’를 하며 회사를 훌쩍 떠났다. “회사가 잘나갈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너무나 다른 임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여 혼란스러웠습니다.”그는 직원들의 청으로 사원대표를 맡았다. “싫다고 했더니 직원들이 집에까지 찾아와 맡아달라고 매달렸어요.”우선 그는 직원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하나둘 설득해 나갔다. 직원들도 회사를 살리겠다며 모두가 동참했다. 그러나 행운은 비켜가고 있었다. 회사를 살리겠다며 뛰어든 투자업체들은 자금압박으로 잇따라 손들고 말았다. IMF 여파로 정말 힘겨운 때였다.직원들 손으로 회사를 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채권단을 찾아가 회사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박사장은 당시 최대 채권단이었던 동부화재에 찾아가 회사가 회생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또 대리점과 부품업체도 찾아가 전체 납품내금 25억원 중 우선 30%만 지급하기로 합의하고 부품공급을 받는 등 새로운 출발을 준비했다.이런 과정을 통해 박사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1999년 1월4일 ‘척척보일러’라는 법인을 세웠다. 전직원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2억원이 종자돈이 됐다. 회사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43명 모두가 주주로 참여했다.“창립행사일은 몹시 추웠어요. 입김으로 손을 녹여야 할 정도였죠. 하지만 직원들의 얼굴은 환한 웃음으로 밝은 표정이 역력했어요.”그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지난 2년여 동안 부도회사를 이끌어 오면서 겪어왔던 온갖 풍파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 눈에 괸 눈물을 훔쳤다”고 회고했다.새로운 간판을 내걸자 직원들이 똘똘 뭉쳐 회사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원가절감을 위해 폐자재(고철)를 버리지 않고 분리해 사용했고 현장의 조명, 난방 등을 최소화했다. “직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한겨울 추위에도 난방온도를 최저로 낮추고 내복을 껴입는 절약을 했습니다.”생산공정도 변경했다. 예전 같으면 버너를 외부에서 사다 조립만 했으나 경비절감을 위해 부품을 자체개발했고 조립도 직접 했다. 박사장은 항상 작업복을 입고 현장을 누빈다. 손에 기름때가 묻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다.박사장과 직원들의 열정으로 매출도 쑥쑥 올라갔다. 회사설립 첫해인 1999년 4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크지 않지만 흑자도 실현했다. “흑자실현을 축하하는 삼겹살 파티를 열었죠.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시는 불명예스런 멍에를 쓰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척척보일러는 매년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는 매출 59억원(순이익 3억원)을 달성했다. 올해는 매출 70억원에 5억원의 순이익을 올려 흑자기조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박사장은 전사원이 주주인 만큼 이익이 난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분을 한다. 지난 2001년에는 직원(주주)들에게 주당(액면가 5,000원) 300원씩 배당을 실현했다. 지난해는 새로운 투자로 배당을 하지 못했다.박사장은 공장이전 계획을 갖고 있다. 경기도 화성에 마련한 2,000여평의 부지에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 새둥지를 튼다는 생각이다. 2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며 직원들을 위한 사택도 짓겠다는 구상이다.특히 그는 앞으로 ‘청정보일러’가 보일러 시장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생각에 전기보일러 분야 개발에도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는 환경을 중요시하는 기업이 존경받는 기업으로 성장하지 않겠느냐”며 연구실을 지키고 있다.이러한 환경산업의 일환으로 박사장은 폐타이어 재활용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 일본의 아이칸사와 폐타이어 재활용시스템을 생산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척척보일러는 아이칸사의 기술을 이전받아 생산을 하고 판매는 아이칸사가 한다는 조건이다.“이 기술은 폐타이어를 태우는 방식이 아니라 간접가열방식으로 처리해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게 특징”이라며 “타이어에서 중유를 회수하고 남은 찌꺼기로 활성탄을 생산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올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박사장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직원 자녀들이 들어와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소망이라는 그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032-515-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