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에서 유통까지’ 지난해 270억원 매출 실적… 디지털카메라 즉석인화·해외진출 모색 등으로 450억원 매출목표

경기도 광명에 있는 케이알씨넷의 김종덕 회장(51)은 두 번의 부도를 겪고도 당당히 일어선 오뚜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굴곡의 삶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말하는 김회장. 그는 국내 음반유통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온 열정을 쏟고 있다. 한국음반제작업협동조합 이사장까지 맡아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김회장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어머니가 4남매를 키웠습니다.힘에 부쳐 했던 어머니를 보면서 장남인 저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등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했습니다.”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1972년 전주에 있는 삼양사. 월급으로 그동안 살림을 꾸리기 위해 진 빚을 갚아나가며 동생들을 돌봤다.1975년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가난 때문에 신혼여행을 못간 것이 늘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신접살림은 전주에서 단칸방 생활로 시작했다. 결혼 나흘 만에 남동생과 함께 살아야 했고, 그 이유로 좁은 방을 둘로 나눴다.부엌도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살기란 너무 힘겨웠다. 월급은 빚을 갚아야 했기에 늘 쪼들렸다. 아내는 부업이라도 하겠다며 나섰고, 결국 그해 가을 속옷대리점을 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속옷가게도 적자가 계속돼 3년 후에 정리했다. “당시 가게를 정리하고 나니 40여만원이 적자더라고요.” 김회장은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감싸 안으며 “괜찮아요. 좋은 경험했다 칩시다”고 조용히 말했다 .아내의 실패를 만회해주고 싶었던 그는 82년 학교 근처에 서점을 내줬다. 한국방송통신대 학생이었던 그는 방송대 교재와 사진현상, 레코드판 등을 함께 팔았다. 장사가 잘돼 1년 후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서점 일에 매달렸다. “빚도 갚고 집과 자동차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었습니다.”잘나가던 그는 85년 말 4억원이라는 돈을 떼이면서 어쩔 수 없이 부도를 냈다. 그동안 잘 알고 지내던 교육재단의 이사장에게 어음을 받고 돈을 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이사장은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앞이 캄캄했다.“아무리 돈을 끌어다 막아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87년 12월 아내를 남겨두고 도피하다시피 집을 떠나 경기도 의정부시로 갔다. 사글셋방을 얻어 용기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재기의 몸부림을 쳤다. 몇 개월 지나 집에 갔더니 저녁을 굶어 “배가 고프다”며 우는 아들을 보고 김회장은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김회장은 “당시 쓴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음반회사를 차리려 했던 그는 서울 미아리의 허름한 창고에서 음악테이프를 녹음해주는 일로 재기에 나섰다. 당시 정부에서 음반회사 허가를 내주지 않아 음반회사는 허가권만 수억원에 달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절이었다.1년 후 기회가 왔다. 허가 기준이 완화되면서 누구나 음반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됐다. “88년 4월 허가를 받을 때까지 배성현 목사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배목사는 김회장을 위해 직접 의정부시에 공장을 물색해주고 보증금 200만원까지 마련해 줬다. 하지만 그해 여름 수해로 공장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금호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도 음악테이프를 녹음했다. 가진 것이 없어 생활은 비참했다. “큰놈한테 구멍난 티셔츠를 입혀 학교에 보냈더니 “애들이 거지라 놀린다”고 울면서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힘은 들었지만 사업은 그런대로 유지해 나갔다. 이듬해 종로로 공장을 확장 이전했고 가정형편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93년 11월에는 용산에 경매로 나와 있는 건물을 사 사옥도 마련했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내와 기도를 하고 이웃사랑 실천을 위해 몇몇 뜻이 맞는 지인들과 ‘한국사랑회 중앙본부’를 발족하고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봉사활동도 꾸준히 했다. 94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 총동창회장도 맡았다. 사세가 빠르게 커지면서 국내에서 카세트테이프 생산순위 3위 업체로 성장했다. 직원수도 늘고 공장규모도 커지고 벅찰 정도로 회사는 성장하고 있었다. 연간 매출액이 30억원이 넘을 정도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김회장. 하지만 97년 말 불어닥친 IMF는 김회장을 다시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직원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오며 “사장님, 고려원과 계몽사가 부도났어요”라며 격분해 외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고 그는 말했다. 최대 거래처였던 두 회사로부터 맞은 부도액은 1년 매출액과 맞먹는 약 30억원.집 등 전재산을 처분했지만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다시 부도라는 쓰라림을 맛봐야만 했다. “죽고 싶다는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신앙심이 아니었다면 극복하기 어려웠을 겁니다.”김회장은 두 번의 부도를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고 강조한다. 다름 아닌 회사가 번창할 때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 “사업이 잘되면 이성을 잃고 사업확장에만 열을 올립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만 위기가 닥쳐도 헤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죠. 그래서 촛불이 켜져 있을 때 어둠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빚은 조금씩 갚아나갔다. 채권자들도 열정을 다해 회생길을 찾고 있는 김회장을 오히려 믿음으로 후원했다. 그는 전근대적인 국내 음반유통시장의 선진화를 통해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외국계 회사에 맞서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국내 음반유통시장은 수요예측이 안돼 유행음반인데도 재고가 남거나 정작 필요한 시기에 공급이 제대로 안돼 판매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김회장은 이 같은 국내 음반유통시장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0년 4월 음반유통시장에 뛰어들었다. 지구레코드, 도레미레코드 등 국내 40여개 음반유통회사들이 김회장의 든든한 후원자다.게다가 광명시는 음반물류센터 건립부지 1만평을 무상지원하고 주주로까지 참여했다. 지난 2001년에 미국의 오스틴시 뮤직네트워크와 업무협약 체결, 지난해 음반유통회사인 탑뮤직 인수와 굿데이신문사 신주인수계약 체결(2억원) 등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케이알씨넷은 최근 디지털카메라 즉석인화와 함께 사진을 휴대전화에 전송하고 캐릭터사진 꾸미기 등이 가능한 ‘디카따우니’를 내놓는 등 사업분야를 늘리고 있다. 김회장은 “음반 통합물류시스템을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협의하고 있다”고 말해 케이알씨넷의 해외진출도 머지않았다. 지난해 27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매출목표는 450억원이다.김회장은 “최대 음반유통회사로 키우겠다”며 힘줘 말했다. (02-2060-7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