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는 돈의 값이다. 돈이 돈(이자)을 만드는 것을 돈놀이라고 한다. 왜 ‘놀이’라는 말을 붙여놓았는지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이자처럼 많은 궁금증과 공포감을 자아낸 단어는 없다. 돈이 돈을 낳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고민 이상의 갈등을 인간에게 안겨주기도 했다.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독일 고리대금업을 유태인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 스스로를 이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높낮이를 조정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논문들이 쓰여졌다.돈이 돈을 불리는 것에 대한 반감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도 부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자를 금지한 문화권도 없지 않았고, 대부분의 종교들 역시 이식 또는 이자를 죄악시하고 있다.중세 가톨릭에서도 이자문제는 치열한 논쟁거리의 하나였다. 어떠한 채무도 50년이 되면 완전 탕감해주어야 하는 유태인들의 제도 역시 부채가 부채를 낳는 악순환을 막아보자는 지혜였을 테다.고리채와의 싸움은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designtimesp=23993>에서 보는 그대로다. 이 어설픈 베니스 상인은 결국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살점을 베어낼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만다. 베니스가 어디인가. 르네상스의 꽃이며 산업화사회로의 길을 열었던 곳이다.고리사채꾼에 대한 반발은 농업사회나 상업사회나 별반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지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사채금리 상한선을 굳이 법으로 규제하는 것만 보더라도 고금리에 대한 세간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도대체 금리수준은 어느 정도라야 적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금리와 세금은 비슷한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는 10%선에서 수렴돼 왔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로마시대에도 개인간에 자금대차 및 개인과 정부간에 세금은 대개 10%선에 일치돼 있었다는 것이고 20세기 들어서도 대부분 국가의 정기예금은 10%선에서 미세한 상하변동을 보여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오랜 전통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세금이든 금리든 10명이 1명을 먹여 살리는 제도는 나름대로 수긍이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그러던 금리가 결국 한 자리로 내려앉았고, 최근에는 제로금리에 마이너스 금리까지 출현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들 만하다. 물론 성장률이 떨어지고 물가상승률이 제로에 가까워져 있으니 금리가 하향안정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자칫 디플레이션으로 이행된다고 하는 점일 텐데, 이는 사실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마이너스 금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보도가 엇갈리고 있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서로간에 자금을 빌려주고 받으면서 돈을 빌려주는 쪽에서 이자를 내는 기이한 일이 최근 벌어졌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다.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최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이너스 금리를 금리라고 부를 수는 없다. 엔/달러 통화스와프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나눠 갖는 방편으로 콜자금 대차를 이용한 것일 뿐이어서 이를 놓고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려면 돈을 빌려주는 쪽이 이자를 낼까마는 워낙에 금리가 떨어지다 보니 별 난해한 금융기법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공정금리가 떨어지고 있다고 해서 사금융의 금리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금융시장에 돈이 많다고 누구에게나 돈이 많은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금융을 이용할 기회가 더욱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쪽에서는 금리가 부르는 것이 값인 곤궁한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제로금리의 어두운 그림자가 갈수록 길어지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