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입경영으로 IMF파고 ‘극복’… 수출150만달러 포함 1,000억원 매출목표

삼목정공의 김용현 회장(64)은 지난해 여름 서울 여의도 트럼프월드 현장을 찾았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숨조차 쉬기 힘든 날이었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있었다.하지만 김회장의 가슴은 시원한 폭포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마천루를 향해 올라가는 빌딩을 보면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개발한 거푸집을 떼어낼 때마다 한 층씩 올라가는 빌딩을 쳐다보면서 김회장은 건설현장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울산이 고향인 김회장은 동아대를 졸업한 1963년 부산의 대표기업인 동국중기의 엔지니어로 들어가 기계와 연을 맺었다. 최고의 엔지니어를 꿈꾼 그는 동국중기에서만 20년을 근무했다.한국철도차량 개발회사로 고급기술력을 갖고 있던 동국제강은 5공화국 때 방위산업체로 선정돼 비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김회장은 당시 관리상무로 이 사업을 총괄했다. 정부에서는 창원공단의 10만평을 무상 제공하는 등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됐다.“당시 200억원을 투자해 미국, 독일 등지에서 기계를 들여와 시설을 갖추고 직원을 충원하는 등 엄청난 투자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방위산업 확장 정책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기계를 놀려야만 했다. “2년여간 지속된 자금난에 하루하루가 뼈를 깎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거의 부도지경에 처했어요.”회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당시 임원 5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이때 김회장도 회사를 떠났다. 그때가 83년 10월이다.친구를 만나며 소회하던 김회장은 사업아이템을 놓고 고민했다. 봄비가 내리던 이듬해 4월 그는 사막의 건설현장을 누빈 지인으로부터 중동에서는 빌딩을 지을 때 철재 거푸집을 이용하는데 조립, 설치, 해체가 간편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얘기를 듣자 김회장은 무릎을 ‘딱’ 쳤다. 그는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거푸집사업에 뛰어들었다.5,000만원의 종자돈으로 사무실부터 마련했다.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허름한 상가에 사무실을 냈다. 이곳에서 약 8개월간 연구에 매달렸다. “조금만 연구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결과물은 없고 애를 많이 태웠습니다.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죠. 집에는 빨랫감을 들고 가는 정도였어요.”주머니에 돈이 다 떨어질 때쯤 김회장은 철재 거푸집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목재 거푸집과 달리 100회 이상을 사용해도 거뜬한 제품이었다. 개발소식이 알려지자 건설회사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삼성건설이 시공하는 부산지하철에 처음으로 공급했어요. 금액으로는 2억원도 안되는 2,000㎡ 물량이었습니다.” 그는 “공급된 철재 거푸집은 50회를 재사용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당시 국내 건설업체들은 철재 거푸집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삼목정공이 개발, 부산지하철 현장에서 성공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건설업체들의 관심이 고조됐다.현대건설, 극동건설. 동아건설 등 국내 주요 건설업체들에서 공급요청이 잇따랐다. 회사규모는 커져갔고, 지난 86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거푸집 생산업체인 사이먼스와 기술제휴를 맺었다.“사이먼스의 최고기술자가 국내에 3개월 상주하면서 기술이전을 해줬는데 기술력 향상에 밑거름이 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해부터 사이먼스에 매년 10만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유대를 맺어오고 있다. 88년 1월에는 경기도 시흥에 12억원을 들여 건평 800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직원도 120명으로 늘리는 등 사업확장에 나섰다 .탄탄대로를 걸을 줄만 알았던 김회장은 88서울올림픽 이후 생각지 않은 고전을 했다. 건축시장이 활황세를 타면서 거푸집이 인기상종가를 치자 이 시장에 진입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미주공업, 금강공업, 동일제강 등 5~6개 기업이 생겨나 숨막히는 경쟁을 했다. “수주를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도 생각만큼 성과가 없고 죽을 맛이었습니다.”하지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김회장이었다. 환란이 한국경제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던 98년 경쟁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과당경쟁에 무리한 투자가 원인이 돼 경쟁업체들은 IMF라는 거친 파고에 손을 들고 말았다.김회장은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은 것이 환란극복의 힘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삼목정공은 80억원 가량 부도를 맞아 경영상태가 어려웠다. “이자가 기둥뿌리를 뽑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93년 이후 무차입 경영에 돌입했다. 갑자기 닥칠 외풍에 대비하기 위한 유비무환 전략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환란 속에서도 끄떡없이 버텼다.“무차입 경영을 하는 중소기업도 있다는 것을 언론에 알려 본보기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업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빚 없는 회사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IMF 극복은 김회장에게 행운을 가져다줬다. 거푸집 수주를 독점하게 된 것. 매년 30% 가까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국내 시장점유율 35%로 1위 자리를 확고히 했다.김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건물이 고층화되면서 철재 거푸집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고층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고강도이면서 가벼운 거푸집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98년부터 알루미늄 거푸집 개발에 돌입했다.“알루미늄 거푸집 개발에 무려 200억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습니다. 20여명의 엔지니어가 1년간 밤낮없이 개발한 성과입니다.” 알루미늄 거푸집은 국내에서 삼목정공만 생산하고 있다.삼목정공의 거푸집은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다. 설립 초기부터 수출을 시작한 김회장은 미국, 베트남,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등 1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94년에는 말레이시아의 한 거푸집 생산회사의 요청으로 생산기계 판매와 함께 기술을 이전하기도 했다 .김회장은 대북사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통일 이후 북한에서 건축현장이 많아질 것에 대비해 개성공단 입주신청(3,500평)을 해놓고 있다. 이와 함께 김회장은 타워크레인 생산업체인 삼목을 87년에 설립해 경영하고 있다.대부분의 업체들이 외국에서 수입해 임대사업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삼목은 뚝심으로 기술을 자체개발해 생산ㆍ임대하고 있다. 김회장의 기술개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김회장의 경영전략은 단 하나다. 현재하고 있는 사업과 무관한 사업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직도 개발과 개척해야 할 게 많은데….”코스닥 등록기업인 삼목정공은 올해 수출 150만달러를 포함해 1,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02-561-0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