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거짓으로 속이지 않았고 상환 능력 있어 사기 성립 안 돼”

[법알못 판례 읽기]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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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당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가계 빚은 1800조원을 돌파했다. 은행들은 금융 당국의 조치에 따라 가계 대출 한도를 줄이고 있다. 은행을 통해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지자 개인 간의 금전 거래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지인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면 유심히 살펴봐야 할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돈을 빌려 줬다면 나중에 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사기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 달만” 애원에 2000만원 송금…약속 일자에 돈 못 받아

A 씨는 2015년 2월 1일 과거 직장 동료였던 B 씨에게 전화를 받았다. B 씨는 A 씨에게 “돈을 융통할 곳이 없는데 2000만원만 빌려 달라”며 “2월 말까지 갚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2000년께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15년 지기였다.

A 씨는 2004년 홍보회사를 창업하고 B 씨는 2007년 방송국으로 이직했지만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오래 알고 지낸 B 씨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A 씨는 자신이 사내이사로 있는 회사의 돈을 이용해 2000만원을 B 씨에게 송금했다.

하지만 A 씨는 약속된 날짜에 돈을 받지 못했다. 이로부터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7년 4월, 빚 독촉에도 B 씨는 A 씨의 돈을 갚지 않았다. 결국 사건은 대여금 반환 소송과 함께 ‘사기’ 형사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검찰은 B 씨가 A 씨의 돈을 갚을 생각이 없으면서 탈취한 것으로 판단했다. B 씨는 약 1억9700만원의 금융 기관 채무와 1020만원의 개인 채무를 합해 총 약 2억700만원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 A 씨에게 2000만원을 빌린 이후에도 금융 기관을 통해 580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기도 했다.

검찰은 “B 씨는 A 씨에게 빌린 돈을 통해 다른 채무를 변제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을 뿐이지 피해자에게 차용금을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B 씨는 “방송국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연 6000만~7000만원 이상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며 “변제 능력이 충분해 돈을 편취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손을 들어줘 B 씨의 사기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B 씨는 피해자의 돈을 빌린 직후부터 다른 개인 채무와 아내의 금융 기관 채무 변제에 사용하도록 하는 등 다른 빚을 돌려 막기 식으로 변제하는 데 사용했다”며 “직장에 재직하는 동안 2014년에 연 7550만원, 2015년 연 6940만원 등 근로소득이 있었음에도 A 씨의 돈을 변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변제할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속일 의도로 A 씨의 돈을 빌렸다고 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B 씨에게 벌금 500만원 형을 선고했다.

B 씨는 이에 불복해 항고했다. B 씨 측 변호인은 “B 씨의 연 수입이 6000만원이 넘는 상태였다”며 “차용금을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실의 오인 내지 법령 위반”이라고 다시 한번 주장했지만 항소심 재판부 역시 “증거를 종합하면 원심이 인정한 모든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양형 역시 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B 씨는 상고했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가게 됐다.

대법 “경제 상황 어려운 것 알았다면 사기라고 할 수 없어”

3심은 하급심의 판단을 뒤집어 버렸다. 대법원 제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8월 26일 B 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사기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B 씨가 돈을 빌릴 당시에는 A 씨의 돈을 변제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빌린 돈을 변제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는 ‘민사상 채무 불이행’에 불과할 뿐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설명이다.

또한 대법원은 “A 씨와 B 씨는 이 사건 차용 직전인 2014년 피고인이 이직한 방송국의 외주 프로젝트와 관련해 10개월 정도 같이 일한 적도 있었다”며 “이와 같은 사정에 비춰 보면 피해자는 피고인의 사정이나 경제적 형편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돈을 빌릴 당시 B 씨가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고 말하는 등 신용 부족 상태를 미리 고지했다며 A 씨가 변제 불능에 대한 위험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우로 봤다. 재판부는 “변제 의사, 변제 능력 등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허위 사실을 말한 게 아니라면 B 씨에게 편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B 씨가 돈을 2월 말까지 갚겠다고 한 것은 변제 시기를 2015년 2월 말로 특정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변제 가능성을 고지한 것으로 보일 뿐”이라며 사기죄의 성립 요건인 기망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변제 시기는 A 씨가 빚을 독촉한 2017년 4월로 보는 게 맞으며 B 씨는 돈을 빌릴 때부터 갚지 않을 의도였다기보다는 다니던 방송국에서 실직하게 되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돼 갚지 못하는 사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대법원은 “차용금 편취에 관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단정해 유죄를 인정한 원심은 사실 오인이 있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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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2021년 사법연감 톺아보기
코로나19 불황의 그늘…사기·공갈 급증

지난해 사기·공갈죄 재판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개인 파산 신청 건수 역시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법조계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서민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9월 28일 발간한 ‘2021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0년 1심 형사 공판 사건 가운데 사기·공갈죄 재판(4만9826건)이 전년(4만3931건)보다 13.4% 늘어났다. 사기·공갈죄 1심 재판만 약 5만 건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사기 사건의 증가는 경찰청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207건에 불과하던 스미싱(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 금융 사기) 범죄 발생 건수가 지난해 822건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올해 8월까지 접수된 스미싱 범죄는 829건으로 연간 건수로 역대 최고치였던 지난해를 이미 넘어섰다. ‘재난지원금’, ‘백신 접종’ 등 코로나19 관련 문구가 피해자 수를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사기와 공갈죄 등을 경기 침체를 반영하는 ‘불황형 범죄’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범죄 증가 추이가 실물 경기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초동의 한 형사 사건 전문 변호사는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등 사람 간 금전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형사 소송에서 사기죄를 인정받으면 민사 소송도 수월하게 끝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기는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을 속이려는 행위, 즉 ‘기망’하려는 의도 혹은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정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 침체의 모습은 개인 파산 신청 건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벼랑 끝에 내몰려 개인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법원에 접수된 개인 파산 신청은 5만379건으로 전년(4만5642건) 대비 10.4% 늘었다. 2015년 이후 5년 만의 최대치다.

지난해에는 법인 파산 신청도 1069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10년 정도 감소세를 지속해 온 개인 파산 신청 건수는 2019년 증가세로 돌아선 뒤 지난해까지 2년 연속 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용 충격이 개인 파산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