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과 함께했던 정의석·강성모·홍성국 애널리스트

[2022 상반기 베스트 증권사·애널리스트]

(편집자 주) 어제는 오늘을 만들고 오늘은 내일을 만든다고 한다. 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출중한 후배들이 나와 선배들의 명성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늘의 인재들은 선배들의 보이지 않는 영향 속에 성장했다.

한국 증권 산업의 한복판에 있는 애널리스트의 역사를 정리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취지를 접한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이 한경비즈니스에 편지를 보내 왔다. 역사를 정리하며 선배 애널리스트들에 대한 개인적 헌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개인적인 얘기라 망설여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편집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후배가 헌사를 남기고 싶은 선배라면 그들의 일과 삶은 기록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한경비즈니스는 앞으로도 한국의 자본 시장과 함께한 더 많은 애널리스트들의 발자취를 기록할 예정이다.



필자는 1997년 11월부터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직장 잡기가 어렵지 않았던 외환 위기 직전에 취업해 신입 사원 때부터 리서치센터에 발령받아 지금까지 애널리스트로 살고 있다. 일하면서 통찰력 있는 선후배들을 많이 만났지만 세 분의 선배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내 애널리스트 생활의 스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 정의석 신한금융투자 상무. 사진=한국경제
고 정의석 신한금융투자 상무. 사진=한국경제
전 신한금융투자 고 정의석 상무정의석 상무는 1960년생으로 1990년대 초부터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필명을 날렸다. 그는 소수 의견을 내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1992년 부실기업들이 대규모로 나올 때 부도 예상 기업들에 대한 경고 의견을 담은 ‘멍멍이(doggie) 시리즈’ 리포트는 장안의 화제가 됨과 동시에 필화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모처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관이 남겼다는 ‘글은 참 빈틈 없이 잘 썼네’라는 말은 이 보고서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실제로 보고서에서 언급됐던 기업들은 얼마 후 대부분 도산했다. 내가 신입 사원 때 들은 정의석 상무에 대한 무용담이다.

이후에도 정 상무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직전 ‘이무기가 되어버린 용에 대한 보고서’, ‘스티브 마빈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비판의 보고서’ 등 보석과 같은 리포트를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이 악화돼 2005년부터는 독서가 불가능할 정도로 시력을 잃었다. 2011년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을 맡기도 했지만 이미 애널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는 건강이 아니었다. 건강을 잃지 않았다면 한국 자본 시장의 어른으로, 통찰력 있는 애널리스트로 얼마나 크게 기여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도 크다.

정 상무는 내게는 ‘첫 부장’이기도 했다. 입사 2년 차 때 IMF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거의 모든 증권사가 공격적인 구조 조정을 했는데 필자가 일했던 리서치센터도 25명의 애널리스트를 10명으로 줄이라는 주문을 회사 측에서 받았고 나 역시 구조 조정 대상이었다. 업력이 긴 베테랑들로 구성해야 적은 인원으로도 리서치센터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이없는 객기였지만 필자는 부장과의 면담에서 ‘회사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후 부장이 경영진과 만나고 온 후 필자는 리서치에 잔류했다. 고마웠지만 선배들 대신 남았다는 자책이 들기도 했다. 그때 부장이 내게 해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네는 잘할 거야.”

애널리스트는 의견을 말하면서 먹고살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에겐 고마운 직업이다. 하지만 때로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네는 잘할 거야’라는 부장의 격려를 생각하면서 견뎌낼 수 있었다.
강성모 전 한국투자증권 상무. 사진=한국경제 DB
강성모 전 한국투자증권 상무. 사진=한국경제 DB
전 한국투자증권 강성모 상무1962년생의 강성모 상무는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증권)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시황을 썼고 이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옮겨 오랫 동안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외환 위기 당시 한진투자증권 강성모 과장이 썼던 ‘I’m F’라는 촌철살인의 시황은 아직도 내 책장에 스크랩돼 있다.

강 상무는 훌륭한 애널리스트이자 본받고 싶은 교양인이었다. 세상사의 여러 변화들이 주가에 투영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줬다. 주가는 경제를 반영하지만 경제 이외의 넓은 세상도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강 상무는후배들이 쓰는 글에 대해서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오류 등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던 완벽주의 성향의 성실한 빨간펜 선생님이기도 했다.

똑똑한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이 있었지만 후배들에겐 속 깊은 정을 무시로 보여줬던 따뜻한 선배였다. 그는 2008년 리서치센터를 떠나 한투증권의 투자솔루션 본부장 등을 오래 역임하다가 몇 해 전 퇴직했다. 퇴임 후 만학도로 연금 관련 공부를 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앞으로는 시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한국 자본 시장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11일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이승재 기자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11일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이승재 기자
전 대우증권 홍성국 리서치센터장 대우증권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홍성국 리서치센터장을 만났다. 대우증권은 애널리스트에게 참 좋은 회사였다. 리서치에 활용할 수 있는 값비싼 데이터베이스를 원 없이 쓸 수 있었고 조직 내에서도 리서치센터는 깊은 존중을 받고 있었다.

애널리스트 집단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이직도 잦지만 대우리서치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개성 강한 조직 구성원 각자의 원심력과 함께 집단으로서의 강력한 구심력이 공존했다. 홍 센터장은 대우 리서치 특유의 기풍을 만든 분이셨다. 자영업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조직의 일원으로 리서치센터가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홍 센터장의 지적 성실함도 후배들에겐 큰 자극이 됐다. 홍 센터장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섯 권의 책을 저술했다. 모두가 단독 필자로 쓴 단행본이었다. 일상이 변덕스러운 시장의 흐름에 좌우되고 고객과의 미팅도 많은 애널리스트가 진득하게 책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홍 센터장의 주도로 대우증권 리서치는 공고한 지적 공동체를 지향했다. 신입 사원부터 고참 시니어 애널리스트까지 리서치센터의 전 직원이 참여하는 독서 토론 모임 ‘운향’이 상시적으로 운영됐고 리서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고 불렀다. 기업 분석가들과 매크로 분석가들이 함께 참여한 융·복합 리포트가 대우 리서치에서 많이 생산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일상적인 지적 교류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특히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던 2012~2013년 시리즈로 간행됐던 ‘전환의 시대(The age of transition)’ 보고서는 지금 생각해 봐도 자랑스러운 리포트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사이트가 넘쳤다. 정의석 상무에게 소수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배웠고 전폭적인 인간적 신뢰를 받았다. 강성모 상무에게는 정치한 논리적 방법론을, 홍성국 센터장에게는 조직 운영자로서의 통찰을 배울 수 있었다.

필자도 어느새 리서치업계의 선배 그룹에 속하게 됐다. 한 것 없이 시간만 훌쩍 흘러간 것 같다. 선배들을 떠올리면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론 큰 자극이 되기도 한다. 신발 끈 졸라매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