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카프리, ‘사브리나 팬츠’로 불리며 전 세계 인기…아메리칸 미니멀리즘 보여줘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지방시 ①


위베르 드 지방시는 1927년 프랑스 보베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는 ‘고블랭 직물’ 공장의 감독이었다. ‘고블랭 직물’은 유명 화가의 밑그림을 기초로 무늬를 자유로이 짜 넣은 수공예적 방식을 일컫는다. 루이 14세 때 이런 방식의 호화로운 벽걸이 직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지방시는 어릴 적부터 예술과 패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시는 열 살이 되던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패션관을 방문한 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44년 그는 열일곱 살 때 파리 예술학교에 입학해 순수 미술을 공부했다. 이듬해 그는 젊은 디자이너인 자크 파스의 하우스에서 1년간 수습 생활을 거쳐 1946년 로베르 피케에서, 1947년 루시엥 르롱에서 각각 6개월 동안 일했다.

이후 전위적인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부티크에서 4년간 일을 배웠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그의 창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스키아파렐리 부티크에서 유명한 고객들과의 친분은 지방시가 자기만의 부티크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영화 사브리나(1954)에서 사브리나 팬츠(사진 ②)
영화 사브리나(1954)에서 사브리나 팬츠(사진 ②)
직물 공장 운영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받아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
사진 출처 : AFP BBNews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 사진 출처 : AFP BBNews
지방시는 1952년 파리의 알프레드 드비니가 8번지에 자신의 부티크 하우스를 열었고 그해 2월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의 첫 컬렉션은 지방시를 전 세계 패션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와 일반인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스타가 탄생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는 “위베르 드 지방시가 하루 사이에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 어린 천재)’이 됐다”고 극찬했다.

컬렉션은 주로 단품 라인으로 구성됐고 당시 프랑스의 톱 모델이었던 베티나 그라지아니를 무대에 세웠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 자수의 종 모양 프릴(주름) 소매가 달린 흰색 면 블라우스는 모델의 이름을 따 베티나 블라우스(사진 ①)로 불렸다. 이 베티나 블라우스는 크리스찬 디올이 뉴룩을 발표했던 것 만큼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디올의 뉴룩이 우아한 보수 이미지의 디자인이라면 지방시의 디자인은 반대적인 느낌으로 젊고 혁신적이며 심플하고 깨끗한 이미지였다.

이후 그의 컬렉션은 꾸준하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53년 할리우드 스타 오드리 헵번과 만난 이후 날개를 달았다. 지방시는 헵번의 전성기 동안 패션계와 영화 의상에서 여러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이 둘의 조합은 대부분의 패션 잡지에 자주 실리면서 패션 잡지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1960년대의 국제 관계는 냉전의 시대였다.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고 미국 등 서방 세계는 경제가 회복돼 물자가 풍부해졌다. 특히 이때부터 가정에 많이 보급된 TV가 사람들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1950년대 말쯤에는 TV 뉴스가 신문과 잡지, 그 당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정보 전달 수단이었던 라디오 등을 대신하게 됐다.
지방시의 베티나 블라우스(사진 ①)
사진출처: Givenchy
지방시의 베티나 블라우스(사진 ①) 사진출처: Givenchy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취임식 광경이 TV를 통해 중계되면서 패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 엘리자베스 여왕은 노만 하트델이 디자인한 자수 장식의 트레인이 부착된 아이보리 색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그 영향으로 길게 끌리는 트레인과 하이 네크의 윙(wing) 컬러가 선풍적인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는 TV의 보급으로 서서히 쇠퇴됐지만 와이드 스크린, 스테레오 사운드, 컬러 영상 도입 등 기술적 혁신이 잇달으면서 인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서부 영화의 인기는 패션에도 큰 영향을 미쳐 웨스턴 패션이 유행했다. 이와 함께 관능적인 이미지의 마릴린 먼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선풍적인 인기로 여성들에게 글래머 패션을 유행시켰다.
마릴린 먼로·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대조적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아메리칸 미니멀리즘을 표현하는 지방시의  오렌지색 코트(사진 ③)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아메리칸 미니멀리즘을 표현하는 지방시의 오렌지색 코트(사진 ③)
청순한 이미지의 오드리 헵번은 동시대의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과 같이 풍만하고 섹시한 여성의 에로틱한 미와 대조되는 새로운 미를 제시해 줬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많은 영화를 통해 헵번의 마른 몸매와 짙은 눈썹의 깜찍하고 어린 소녀의 청순함은 요정과 같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지방시와 헵번은 패션 디자이너와 영화 배우로 콤비를 이뤄 1950년대 이러한 전통의 한 원형을 만들었다. 지방시는 헵번의 영화 의상을 맡아 디자인했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주연 배우 헵번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활기찬 말괄량이 스타일이 나타났고 오늘날까지 헵번의 팬들은 이 영화를 즐겨 본다. 영화 속 헵번이 착용한 지방시의 검은색 카프리 팬츠는 다리 부분이 꼭 맞는 7부 바지로 ‘사브리나 팬츠(사진 ②)’로 불리게 됐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사브리나 팬츠는 여성의 타운웨어에 팬츠를 도입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여성 복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지방시는 헵번의 사치스러운 의상과 소박한 의상을 번갈아 가며 보여줌으로써 한편으로는 활발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독한 도시의 여인으로서의 주인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헵번의 지방시 패션에서는 아메리칸 미니멀리즘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헵번이 티파니 보석상에 갈 때 입은 오렌지색의 심플한 코트는 아메리칸 미니멀리즘을 잘 표현하고 있다(사진 ③).

창가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문리버(Moon River)’를 부를 때 입은 팬츠 또한 지방시가 디자인한 사브리나 팬츠였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뉴욕 티파니 본점 창문을 들여다볼 때 입은 라운드 네크라인에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시스 드레스(sheath dress : 체형에 꼭 맞는 드레스)가 인기을 끌었고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나타냈다(사진 ④). 영화에서 헵번의 검은색 위주의 의상은 진주 목걸이와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깊게 파인 뒷모습, 롱 장갑 등의 액세서리와 조화를 이루며 토털 코디네이트 룩을 창출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블랙 쉬즈 드레스(사진 ④)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블랙 쉬즈 드레스(사진 ④)
참고 자료 : ‘디자이너 지방시의 영화 의상에 관한 연구’, 이재연,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