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의 다시, 연결]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선생님, 안녕하세요. 14년 차 팀장으로 근무 중인 U입니다. 팀장으로 승진 이후 무언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주변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으쌰으쌰 하자고 힘을 내봤지만 제 마음처럼 따라온 이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 속도를 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맞춰 걷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습니다.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마음가짐을 바꿨어요. 그들 속도에 맞춰 주자. 제가 혼자 앞서나가는 것이 동료들이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그게 저를 오히려 억누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상태요.

다른 팀장은 제게 동료들과 친해지면 조금 낫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저는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나 그런 타입입니다. 아무리 친해져 봐도 역시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느낌이 들 때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회사가 곧 저인 것처럼 살아왔는데….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그 주역이 된 것 같아 패배감·좌절감·미안함 같은 여러 마음이 듭니다. 책임감 때문에 부담감이 매우 심해 가끔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힘을 내야 하는데 힘이 영영 안 나면 어떡해야 할까요.
[안주연의 다시, 연결]“‘번아웃 어떡해야 할까요”
A. U 님 안녕하세요, 첫 편지로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읽어 보니 그동안 일하면서 U 님이 느끼셨을 부담감·외로움·소진감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고민과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지만 특히 U 님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 사연을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나지 않고 U 님의 성향과 어려움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편지를 바탕으로 상상해 본 U 님은 일에 대한 열정이 크고 회사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도 강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회사에 기여하는 것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인정 욕구가 큰 분들은 모든 일에 높은 기준을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본인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어 가며 업무에 매달립니다. 여기에 더해 U 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문제나 결함, 이에 따를 비판을 많이 걱정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완벽주의를 가진 팀장으로 보입니다. 리스크에 대한 고려가 너무 크다 보니 팀원들의 업무 수행 중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누구에게도 일을 위임하기 어려워져 혼자 일을 도맡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업무에 집중하다 못해 집착하는 일 중독 상태가 돼 신체적·정서적 건강을 해치게 될 수 있는데, U 님의 편지에서도 이러한 피로감과 소진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인정 욕구와 완벽주의가 강한 팀장은 무리한 목표와 기준을 제시하며 팀원들을 몰아붙이는 ‘가혹한 상사’가 되기 쉽습니다. 팀장과 팀의 단기 실적은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팀 전체가 번아웃에 빠지거나 팀워크가 깨질 가능성이 높죠. 그런데 U 님의 경우는 많이 다릅니다. 기준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업무에 대한 목표와 기준을 제시하고 피드백을 주며 팀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 팀장의 역할일 텐데, U 님은 오히려 자신만 속도를 내는 것 같으니 자신이 팀원들에게 맞춰 걷겠다고 결심합니다. 언뜻 보면 팀원들의 속도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좋은 팀장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U 님은 ‘동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그러다 보니 팀장의 중요한 업무인 팀원들에 대한 피드백과 평가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생길 상대의 감정적 반발과 갈등 그리고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지요. U 님이 갖고 있는 ‘타인과 긍정적·애정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회복하고 싶어 하며 그것이 잘되지 않아 거절당하고 고립될까 두려운 마음과 동기’를 심리학에서는 ‘친애(affiliation) 욕구’라고 합니다. 친애욕구가 아주 높은 사람은 일보다 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많은 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경쟁적인 상황을 피하고 타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것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친애 욕구가 높은 사람이 피하고 싶은 것들이 모두 팀장이 팀을 이끌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업무 갈등입니다. 갈등을 회피하고 직접적 피드백을 아끼다 보면 U 님 안에 있는 일에 대한 기준과 성취감을 채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영자들도 U 님을 회사의 엄마와 같은 존재로 믿고 의지하다 보니 U 님의 열정과 유능함은 당연한 것이 돼 칭찬이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정 욕구가 지속적으로 충족되지 못하면서 회사가 곧 나라고 생각하던 U 님은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듯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노력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니 실망과 분노, 체념을 반복해 경험하면서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번아웃 상태에 접어들었겠지요.

그렇다고 업무의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켜 내고 싶던 동료들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팀장이라는 자리가 원래 고독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U 님과 같은 성향의 분들은 사람들과 멀어졌다고 느껴지면 크게 마음이 위축되고 외롭게 느껴집니다. 지금의 U 님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U 님은 어떻게 회복해 나가면 좋을까요. 우선 저는 U 님에게 본인에 대한 믿음을 갖고 본인을 수용해주라고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U 님은 열심히 일하면서 한 업종에 15년 가까이 종사해 왔고 경영진의 신뢰를 받으며 활약해 온 유능하고 열정적인 직장인입니다. 짧은 편지만으로도 U 님의 성실성·헌신성·유능함·배려 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인정을 구하기 전에 열심히 일해 온 스스로를 수용하고 인정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갑자기 주변의 평가에서 초연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위험과 고립에 대해 과도하게 경계하게 된 데는 살아온 날들의 상처나 트라우마가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에 대한 따뜻하면서 통찰적인 시선을 키울 수 있는 상담 치료를 권합니다. 또한 쉬는 날에는 편안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자극이 적은 자연에 머무르면서 편안함을 경험해 보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팀장으로서 조직 그리고 팀원들과 보다 구체적인 소통을 시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U 님의 편지에서 두드러졌던 표현이 ‘내 마음 같이 되지 않는다’,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알아서 자신의 기준에 맞춰 주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알아서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하기 싫고 갈등을 빚기 싫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갖게 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도 알기 어려운데 타인의 기대와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회사와 구체적으로 소통하고 우리 팀에 어느 정도의 업무 수행을 기대하는지, ‘제대로 굴러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지 수치화해 보면 좋겠습니다. 팀원들에게도 U 님이 팀장으로서 원하는 업무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모습이 ‘내 마음처럼’ 소통하고 일하는 것인지 공유하고 조율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갈등도 일어날 수 있고 팀장으로서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U 님 스스로의 취약성 또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U 님의 욕구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직접적인 업무적 소통을 하는 데도 유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U 님의 회사와 상사, 동료들이 혹시 보고 있다면 U 님의 노력과 열정, 걱정과 두려움을 인정하고 수용해 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일해 왔고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해 스스로를 소진했고 하지만 회복되고 연결되고 싶어 하는 소중한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