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이야기/펜디①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품 패션 브랜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불리는 후임 디자이너를 발탁해 각 브랜드만의 독특한 차별성과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패션 하우스는 창업 디자이너의 활동 마감 이후 새로운 디자이너를 영입하게 되는데 이는 ‘수석 디자이너’, ‘헤드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로 불리다가 20세기 후반 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

디자이너 샤넬 사망 후 칼 라거펠트가 오랫동안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고 크리스찬 디올 타계 이후 디올 하우스를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펜디 또한 라거펠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고 나서 눈부신 발전과 성공을 거뒀다.
1925년 핸드백·모피로 창업, 날로 번창
칼 라게펠트
칼 라게펠트
1925년 에르아르도 펜디와 아델 펜디 부부가 로마에서 핸드백과 모피로 펜디를 창업했다. 아델 펜디 부인은 결혼 전 모피와 가죽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를 운영했었다. 펜디 부부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기도 했고 행운도 함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신흥 중산층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핸드 메이드의 고급 제품들을 원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아델 펜디는 마구의 최고 용품을 만드는 장인을 찾아가 펜디를 위해 일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백이 셀러리아백이다. 1925년에 탄생한 셀러리아백은 이탈리아어로 말안장을 제작하는 워크숍을 의미한다.

펜디 부부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펜디의 명성은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거치면서 로마 지역뿐만 아니라 밖으로 점점 떨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인 1946년 펜디 부부의 다섯 딸들인 파울라·안나·프랑카·카를라·알다가 사업에 함께 뛰어 들었다. 이들은 사업의 핵심인 모피와 가죽을 연구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펜디의 터닝 포인트는 이 다섯 딸들이 당시 파리에서 이름을 날리던 독일 출신의 신인 디자이너 라거펠트를 만난 것이다.
펜디의 첫번째 매장 
사진 출처 : Fendi.com
펜디의 첫번째 매장 사진 출처 : Fendi.com
라거펠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IWS) 콘테스트에서 코트 부문 1등을 수상하면서 파리 패션계에 입문한 뒤 1964년부터 끌로에(Chloe’)에 합류해 수석 디자이너로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펜디는 1965년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라거펠트와 함께 일하게 됐다. 당시 라거펠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다. 라거펠트가 샤넬에 합류한 1984년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라거펠트가 펜디에 합류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모피에 대한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당시 모피는 크고 묵직하고 눈에 띄었고 부를 상징하는 수단이기도 했으며 고가였다. 펜디는 숙련된 모피 가공 기술로 유명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브랜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라거펠트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피를 보통의 직물처럼 다뤘고 자르고 짜고 박음질을 하는 등 다양한 가공법을 사용했다.
모던한 미니멀리즘으로 모피 재탄생시켜
펜디의 더블 F 로고 디자인 가방(사진②)
사진 출처: instagram  fendi
펜디의 더블 F 로고 디자인 가방(사진②) 사진 출처: instagram fendi
이 결과 펜디의 모피는 일상생활에서도 가볍게 입을 수 있는 패셔너블한 제품들로 탄생됐다. 이런 전통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펜디 모피는 단순히 과시용이 아니라 패션에 대한 실험 정신과 함께 세련된 모피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2008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24K 순금을 모피에 코팅한 제품을 선보였는데 예상과 달리 더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모피 본래의 성질을 잘 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모피가 지닌 화려함과 글래머스한 스타일에서 오는 고전적인 우아함을 짧은 모피의 털, 차분한 소재를 선정해 스트레이트 실루엣으로 정돈된 모던한 미니멀리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펜디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권위적이고 장엄한 이미지에 패션성과 여성미를 지향함으로써 좀 더 가볍고 대중적인 펜디만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펜디를 상징하는 더블 F 로고(사진②) 또한 라거펠트의 작품이다. ‘펀퍼(Fun Fur)’라는 더블 F의 로고는 “로고는 인종·언어·문화에 관계없이 소리 없이 말한다”는 라거펠트의 지론대로 펜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5년에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이 ‘펜디-칼 라거펠트, 그들의 역사’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펜디 창립 60주년, 펜디와 라거펠트의 협업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이들이 함께 컬렉션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었다. 진입 장벽이 높은 박물관이 패션에 문을 활짝 열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전시였다.

라거펠트와 함께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맡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안나 펜디의 딸인 실비아 벤추리니로, 창업자의 손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라거펠트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그의 작업실을 지켜봤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패션에 대한 비전을 얘기할 때면 이탈리아 여인 특유의 한 톤 높은 목소리가 배어 나온다.

1997년 실비아 벤추리니가 처음 발표한 바게트백(사진③)은 펜디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 놓은 일등 공신이다. 바게트백은 이름처럼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먹는 빵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가방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장을 보고 나면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우고 다녔는데 이런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백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작은 사이즈의 숄더백은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 옆구리에 끼우기 편한 것이 특징이었다.
바게트백(사진③) 
출처 : Fendi.com
바게트백(사진③) 출처 : Fendi.com
바게트백의 매력은 ‘다양성’에 있다. 6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소재와 컬러·패턴·장식을 적용해 모든 백이 리미티드 에디션의 가치를 지닌다. 벤추리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바게트백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어리석고 쓸모없는 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게트백은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80만 개 넘게 판매됐다.

참고 도서=‘칼 라거펠트 디렉팅의 샤넬과 펜디에 대한 디자인 특성 연구(배우리·김윤경·이경희, 한국의류산업학회지 제23권 제6호)’,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