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빙' 포스터 / 자료=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무빙' 포스터 / 자료=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무빙’ 500억원,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220억원, 영화 ‘밀수’ 175억원…. 올여름 한국의 콘텐츠 시장을 뜨겁게 달군 작품들의 제작비다. ‘무빙’은 역대 한국 드라마 가운데서도 최고 금액의 제작비를 투입해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호평을 받으며 순항하고 있다. 여름 시장 대전에 출사표를 던졌던 대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밀수’ 역시 다른 경쟁작들을 제치고 승기를 거머쥐었다.

블록버스터의 시대다. 장르를 불문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간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이제 제작비 100억원 이하의 작품은 흥행 욕심을 내는 것조차 어려워 보일 정도다. 블록버스터 콘텐츠가 그 덕분에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무빙’처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품이 나오면서 K-콘텐츠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다. 업계에선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는 출혈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리스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다 다 죽어”라는 ‘오징어 게임’의 명대사처럼 이제는 다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치솟는 제작비에 시장 리스크도↑

블록버스터(blockbust)는 ‘초대형 폭탄’이란 의미다. 한 구역(block)을 송두리째 날려버릴(bust) 위력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블록버스터는 콘텐츠 시장을 뒤흔들 만큼 대중의 관심이 높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작품을 이른다.

결국 초대형 폭탄급 위력을 가진 블록버스터 제작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압도적 스케일,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려면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무빙’은 무려 7000여 컷이 컴퓨터그래픽(CG) 작업으로 이뤄졌다. 200억원대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에 비해서도 3배가 넘는 양이다. 이 CG 작업량을 들으면 500억원의 제작비에 수긍하게 된다.

한국의 블록버스터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첫 출발을 알린 작품은 1999년 나온 강제규 감독의 ‘쉬리’였다. 총 3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6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 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웅장한 스케일에 관객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한국 최초로 10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것은 2002년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었다. 그리고 2015년 전후부터 그보다 두배 많은 200억원대 작품들이 잇달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들의 등장은 산업이 한 단계씩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블록버스터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투자가 여기저기에서 이뤄졌다. 이 투자들에 힘입어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대작까지 연이어 탄생하게 됐다. 그렇게 ‘할리우드처럼 왜 멋진 작품을 못 만들까’라는 자조적인 얘기는 옛말이 됐다. 이젠 할리우드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K-콘텐츠 열풍의 바탕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과 발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지나친 과열 양상이 나타나면서 적신호가 켜졌다. 블록버스터가 오히려 산업을 뒤흔드는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블록버스터 콘텐츠가 대거 만들어지면서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100억원대 이상의 블록버스터 대부분은 영화 장르에 국한돼 제작됐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이 형성되면서 영화·드라마를 불문하고 다양한 장르에 걸쳐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무빙’ 같은 OTT가 자체 제작한 시리즈물에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면서 시장 전체의 제작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상파와 케이블 등 TV 채널들도 OTT 콘텐츠에 집중된 시청자들의 관심을 돌리고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제작비를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 제작비도 함께 뛰었다. OTT 등을 통해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콘텐츠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다 보니 계속 제작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성수기를 포함해 200억~3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격돌을 펼치는 상황들이 잇달아 펼쳐졌고 이 승부에서 진 작품은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꽤 볼만한 작품임에도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손익분기점조차 넘지 못하는 사례도 속출하게 됐다.

블록버스터의 흥행 참패는 큰 비수가 돼 돌아오게 된다. 제작비가 적게 투입된 작품에 비해 감독과 제작사에 큰 타격을 안겨준다. 관객들이 크게 기대했던 만큼 흥행 실패의 기억도 다른 콘텐츠보다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블록버스터에만 관심이 집중되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중소형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작품들은 점점 ‘슬리퍼 히트(sleeper hit)’가 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있다. 슬리퍼 히트는 흥행할 줄 몰랐지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게 되는 작품을 의미한다. 화려한 대작들에 지나치게 자주 노출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은 콘텐츠가 주는 소소하고도 정겨운 울림엔 둔감해지게 된다.‘오펜하이머’에서 발견한 블록버스터의 정답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자료=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자료=유니버설 픽쳐스
그렇다고 블록버스터 제작을 아예 해선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블록버스터의 탄생 자체는 위기의식에서 시작됐다. 1950~1960년대 미국에서 TV가 널리 보급되자 영화 산업이 흔들리게 됐다. 그러자 TV 드라마로는 보기 힘든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영화들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다시 극장을 찾게 됐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를 만들더라도 성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 콘텐츠의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국내외 관객과 시청자들이 작품을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되면 오히려 K-콘텐츠 열풍에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외면한 블록버스터 작품들엔 대체로 공통점이 있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그 안에 있는 스토리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특히 CG, 특수효과(VFX) 등 뛰어난 기술력과 스토리의 간극이 크게 나타난 것이 많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며 한국에서도 SF영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를 적극 개척하고 있다.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정도다. 하지만 과거 작품들을 답습한 신파적 설정 등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따라 외형만 바뀌었지 스토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블록버스터에 대한 정답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에서 찾을 수 있다. 8월 15일 한국에서 개봉된 이 작품의 제작비는 1억 달러(약 1300억원)에 달한다. 원자 폭탄을 개발한 실존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에 이토록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핵실험 장면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CG 없이 최초로 핵실험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핵심은 핵실험 장면 자체가 아니었다. 원자 폭탄처럼 터지는 오펜하이머의 내면, 그 깊은 고뇌를 표현한 얼굴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관객들은 놀란 감독의 뛰어난 연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블록버스터란 이런 것이 아닐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