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공감에 숨어 있는 무서운 힘[김한솔의 경영전략]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가정에서도 나를 돕는 가족들이 필요하고 조직에서도 더 큰 성과를 만들려면 고민을 나누는 동료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의 생각이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로 입장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까. 많은 커뮤니케이션 책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서로에게 ‘공감’하기다.

이렇게 얘기하면 “난 T(MBTI의 유형)라서 공감 못해요”라고 지레 포기하는 이들이 생긴다. 하지만 낙담하기엔 이르다. 오히려 공감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F’의 행동이 문제를 더 키울 수 있어서다. 무슨 말일까.
공감이 커지면 위험한 이유최근 필자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기사가 있었다. 한강공원 수영장에서 7살짜리 아이의 머리를 여러 차례 물속에 밀어 넣은 30대 남성의 얘기였다.

내 아이를 혼내거나 장난을 친 게 아니었다. 그날 처음 만난 ‘남의 아이’를 어른이 괴롭힌 것이다. 이유는 7살짜리 아이가 ‘내 아이’에게 물을 튀겨서다. 이해되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빠의 ‘공감력’ 때문이다. 그 아빠는 ‘내 아이’의 상황에 너무 공감하고 있었다. 물이 튀어서 놀란 내 아이의 마음에만 공감한 탓에 그 사건을 일으킨 ‘남의 아이’를 적대시한 셈이다. 이를 ‘공감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특정 집단에 대한 과도한 공감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배척하기 위해 게르만 민족만의 우수성을 어필한 게 대표적이다. 우리끼리의 연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밖에 있는 사람은 더 많이 소외되고 심하게 배척된다. 상대를 이해하는 공감이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공감할 때 우리 뇌에선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그 덕분에 상대에 대한 유대감이 생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나의 관심 밖에 있는, 내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적대심’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증거는 심리학에서 수행하는 ‘암시적 연관 검사’를 통해 밝혀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한국을 좋아하고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에게 ‘한국’과 ‘좋음’이라는 단어를 연관시키는 반응 속도를 측정하고 ‘일본’과 ‘나쁨’을 연결하는 속도를 잰다.

그리고 절반에게만 ‘옥시토신’ 호르몬을 투여한 뒤에 다시 실험한 결과 한국을 좋아한다는 것의 반응 속도가 높아졌다.

옥시토신 덕분에 대한민국에 대한 공감력이 높아진 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이 싫다는 것 역시 강화됐다. 공감 호르몬 옥시토신이 과하게 작용하면, 다시 말해 내 집단에 대한 공감이 커지면 누군가에겐 적대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내 주변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상대에 대한 감정이입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 집단에 대한 공감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 때문에 이들과 다른, 혹은 내 주변을 힘들게 하는 상대에 대한 배타심이 커진다. 깊은 구덩이에 빠지면 주변 환경을 둘러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공감의 역설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가 주로 공감하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의식적으로 찾아보자. 대표적으로 내가 ‘속한 집단’에 우호적인 마음이 생긴다. 우리 팀원들에게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 팀이 아닌 팀원’들에겐 비판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때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려고 노력해 보자. 내가 모르는 사실은 무엇이 있을지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내가 아끼는 집단에 감정적 공감을 하는 것을 넘어서 상황에 대한 ‘인지적 공감’을 만들어내야 한다. 힘들거나 괴롭다는 감정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그걸 만들어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하다 보면 내가 몰랐던 상황이 드러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공감의 ‘깊이’가 아닌 ‘너비’를 키울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기억하자.
공감의 역설을 극복하는 법앞에서 ‘F’의 공감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감정적 공감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T’라서 공감하기 어렵다고 핑계 대진 말자. 더 많은 정보를 알려는 노력 덕에 오히려 균형 잡힌 공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더 조심해야 할 공감의 대상은 따로 있다. 내가 가장 크게 공감하는 존재, 바로 ‘자신’이다. 나와 가까운 동료에 대한 감정적 공감 때문에 적대감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 공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내가 아닌, 다시 말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질 수 있다.

최근엔 이런 성향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접하게 되는 정보가 점점 편향되어 가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게 유튜브 알고리즘과 같은 것이다. 특정 성향이나 취향의 정보를 찾아서 보다 보면 계속 그와 관련된 내용이 딸려 온다. 그러다 보면 한쪽으로의 강화가 계속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공감의 역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자기 행동을 되짚어 보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게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행동은 아닌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게 나에게 ‘비판적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둬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얘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내가 가진 제한된 정보에서만 판단하는 건 아닌지,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 나 자신에게 공감했을 땐 볼 수 없는 걸 알려주는 주변 사람들이 중요하다.

이는 특히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는 사람들에겐 필수적이다. 그래서 리더들은 주변인들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조직 내에선 위계 때문에 윗사람에 대해 섣불리 나쁜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깊이 빠져들수록 주변으로 나아갈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에 대한 공감의 역설에 빠지지 않기 위한 자기 성찰이 중요한 이유다.

성숙한 사람은 유연하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는 회색분자가 아니다. 결정이 필요할 땐 단호히 결정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결정의 과정에 자기 생각과 정반대의 입장이라도 충분히 듣고,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려는 마음, 이게 성숙한 유연함이다. 나의 성숙함은, 그리고 우리나라 리더들의 성숙함은 어느 정도일까. 성숙한 유연함을 바탕으로 공감의 반경을 넓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김한솔 HSG휴먼솔루션그룹 조직갈등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