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언론을 통해 채용방식을 수정하겠다고 발표한지 13일 만인 28일 개편안을 전면 철회했다. ‘서류전형 도입’이 무산되면서 서류면제 혜택을 부여하기로 했던 ‘대학 총장추천제’와 ‘찾아가는 열린채용’도 모두 잠정 유보됐다.


삼성이 내용을 전면 취소할 수 밖에 없었던 데 대해 각계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만큼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서울소재 대학 취업지원실의 한 관계자는 “한 기업의 채용에 대해 당사자들은 물론 정치권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된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청년취업’이 중요한 이슈라는 걸 말해준다”며 “또 삼성이 갖는 대표성도 한 몫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지역의 취업 담당자들은 28일 모임을 갖고 이번 삼성발표에 대한 대응을 논의할 방침이었지만 오전에 ‘전면 유보’ 발표가 있고 나서 일단 삼성 측의 후속조치를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최기원 한양대 취업지원센터장은 “현재 대학 관계자들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며 “다만 이번 발표와는 관계 없이 대학의 채용관련 의견을 전달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의 잇딴 반발에 ‘전면 유보 발표’


삼성이 개편안을 수정하기까지 실수요자인 학생들의 반응이 거센 것이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청년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인 청년유니온은 27일 SNS를 통해 성명을 발표하고 '삼성의 총장추천제를 공식적으로 규탄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한지혜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총장 추천제에 대해 공식 거부 입장을 표명했다. 고려대 총학생회는 "대학 서열화, 대학의 취업사관학교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삼성의 총장 추천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며 "대학을 특정 기업의 목소리에 휘둘리게 만드는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대학 관계자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들로부터 문의전화가 빗발쳤지만 삼성에서 공식적인 이후 조치를 내놓지 않아 '모른다'는 답만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총장추천제 배정인원이 공개되고 나서는 '왜 우리학교는 인원이 이것밖에 안 되느냐'는 항의도 감내해야 했다.


이에 대학들은 대응방안을 모색키로 했다. 서울지역 대학의 취업지원팀 관계자들은 28일 건국대에서 모임을 갖고 이번 총장추천제에 대한 대책 마련에 들어가기로 했고 다음달 5일에는 4년제 대학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이 정기총회에서 총장 추천제 대응방안을 논의키로 했다.


이처럼 논란이 거세지자 삼성은 이번 채용변경방침을 전면 유보하겠다고 28일 공식 발표했다. 삼성은 이 같은 방침에 대해 ‘대학과 취업준비생들에게 혼란을 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학벌·지역·성별을 불문하고 전문성과 인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한다는 열린채용 정신을 유지하면서 채용제도 개선안을 계속 연구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삼성은 보도자료에서 "신입사원 채용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대학총장 추천제로 인해 각 대학과 취업준비생들에게 혼란을 줘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아울러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 연간 20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리고 취업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는 과열 양상이 벌어지며 사회적 비용이 커졌고 스펙 쌓기 경쟁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면서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채용제도를 발표했지만 대학서열화, 지역차별 등 뜻하지 않은 논란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발표 이후 13일, 무엇을 남겼나


삼성이 13일 만에 발표를 전면 철회했지만 대학과 취업준비생들은 대부분 ‘개운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총장 추천제를 계기로 대학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작용했던 대학 서열이 수면위로 떠올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삼성이 24일 전국 200개 대학에 전달한 추천제 할당인원이 외부에 공개되면서 ‘인원 수가 곧 대학의 서열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에 따라 연세대와 고려대 다음으로 많은 인원을 배정받은 경북대학교가 새롭게 재조명되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남긴 한 누리꾼은 “대학 총장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이번 할당인원 표를 통해 삼성이 직접 내부에서 보는 학교서열을 공개한 셈”이라며 “실제 신입 공채에서도 성균관대나 서울대, 연고대생들의 합격률이 확실히 높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총장 추천인원이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 특히 많이 배정돼 있던 데 대해서 인문계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문계 취업난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성균관대에 재학 중인 한재희 씨(영어영문학과·3)는 “성균관대가 가장 많은 인원을 받았지만 대부분 이공계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허탈했다”며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에서 인문계열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 확실시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전했다.


◆’직무전문성’ 중심 채용기조 유념해야


삼성이 우선 서류전형 도입안을 취소하겠다고 밝혔지만 15일 발표를 통해 삼성이 원하는 인재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삼성전자 인사팀의 박용기 전무는 “이공계는 전공과목 성취도를, 인문계는 직무 관련 활동·경험을 중점적으로 평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즉 연구개발직 지원자의 경우 △산학협력 과제 참여 △각종 논문상 △경진대회 수상 경력 등을, 영업마케팅직과 디자인광고직은 △직무 관련 경진대회 수상 △인턴십 등 실무경험 △직무관련 자격증 등을 갖춘 사람을 우대하는 식이다.


박 팀장은 “해외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등 보여주기식 스펙을 쌓기보다는 직무와 관계된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전공 수업을 착실하게 듣는 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삼성직무적성검사(SSAT) 다음 단계에 작성하는 에세이와 면접 때 이와 같은 점을 어필하면 입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SSAT는 개편안 그대로 유지된다. 올 상반기 치러질 SSAT는 기존의 언어, 수리, 추리과목, 직무상식과목 외에 ‘공간지각력’ 영역을 추가된다. 수리영역은 단순한 문제에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상식문제 역시 평소 독서를 많이 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해야 풀 수 있는 형태로 바뀐다. 또 인문학적 지식, 그 중에서도 역사와 관련된 문항을 확대해 역사에 대한 이해력을 지닌 인재가 선발되도록 추진할 예정이다.


SSAT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스펙원의 김원태 콘텐츠 개발 이사는 “논리력을 본다는 의미는 지난해 하반기 추리영역에서 논증문제가 갑자기 추가됐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는 힘’을 평가하겠다는 것 같다”며 “언어영역에서도 단순 단어암기보다는 독해문제가 많이 출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