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

여인네가 탐하는 남정네 한복을 짓는다, 한복쟁이 박상준


“차주 중에 일정 확인되어지면 연통 넣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망극하옵니다.”

인터뷰 요청 차 연락한 기자에게 그가 보낸 첫 문자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연통’은 뭐고 ‘망극’은 뭔가. ‘별에서 온 그대’가 아직 지구에 남아 있나? 아니면 상종못할 사극덕후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면전하던 날, 그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옆구리에는 쿨하게 클러치백을 끼고 있었고, 시크하게 에스프레소 쓰리샷(3-shot)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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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과 클러치백, 테슬로퍼의 이색적인 만남!


외모부터 말투까지,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박상준(28) 씨는 ‘희노애락’이라는 생활밀착형 남성 한복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여인네가 탐내하는 남정네 한복을 짓자’라는 모토로 제작되는 희노애락의 한복은 100% 고객 맞춤형이며, 태와 선, 소재와 색감 모두 고객이 원하는 대로 취향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고객님이 원하는 선과 태에 맞추고 있습니다. 데일리룩으로 입을 수 있는 한복을 지향하다보니 전통복식보다는 길이가 짧고 품이 작은 한복을 짓게 됩니다. 서양복식으로 말하면 소위 ‘슬림핏’이죠. 슬림핏 한복은 서양복과 믹스매치해도 무방한 선과 태를 자랑합니다. 개인 맞춤이라 소재도 ‘느그 하고 싶은대로 해라’예요. 전통한복 원단 외에도 데님, 면, 수입 원단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개성있는 한복을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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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 연기의 대가, '희노애락'의 박상준 대표


매일매일 입고 싶다! 슬림핏 한복의 탄생

삼천포 출신 박상준 대표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부모님을 모셔두고 “옷쟁이가 되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고, 입고 꾸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에게 ‘옷쟁이’는 천직처럼 느껴졌다. 부모님도 재능을 알아보셨는지, 흔쾌히 그의 꿈을 응원해주셨다. 그리고는 ‘고등학교만 무탈하게 졸업하면 서울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는 오매불망 고등학교 졸업할 날만 기다렸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삼천포를 떠나 서울모드패션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2008년, 대학 입학 후에는 본격적인 ‘옷쟁이’가 될 준비를 했다. 마냥 대학 생활을 즐기며 노는 친구들과 달리,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했다. 박상준 대표는 평소 좋아하던 ‘모던 빈티지 클래식’의 감성을 담은 서양 기성복 브랜드 론칭을 준비했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서양복식 외에는 관심없던 그에게 ‘한복’이라는 녀석이 추파를 던진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한복의 매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한복은 굉장히 클래식한 옷인데, 선과 태를 달리하니 모던한 옷이 되고, 소재를 달리하니 빈티지한 옷이 되더군요. 제가 원하는 ‘모던 빈티지 클래식’이 바로 한복이었던 거죠. 그 길로 준비했던 서양복 브랜드를 모두 엎어버리고 한복쟁이로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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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모자처럼 '갓'을 쓰고 다니는 박상준 대표


그는 한복 관련 수업을 듣고, 교수님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한복 관련 책을 추천받아 독학으로 한복에 대해 알아갔다. 직접 한복을 지어보며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태와 선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한복쟁이가 될 거야’라며 큰소리도 떵떵치고 다녔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6년이다.


“군대도 다녀오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막내 디자이너로 사회생활도 하고 나니 6년이 지났더군요. 이제는 진짜로 브랜드 론칭을 제대로 준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1년 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6개월 정도 독학을 했는데,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SNS에 직접 만든 한복을 올려봤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첫 주문이 들어온 거예요.”


클래식 쟈켓을 만들려고 사놓았던 레드 타탄체크의 프랑스 원단으로 만든 한복이었다. 큰 기대 없이 SNS에 올려봤는데, 반응이 후끈했다. 세상에 없던 파격적인 소재로 만들어진 한복, 게다가 일상생활에도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통을 좁혀 실용성을 더한 한복은 한 순간에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개성 있는 패션에 관심 있는 패피라면 욕심낼법한 맵시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박상준 대표는 첫 주문이 들어온 김에 브랜드 론칭을 감행했다. 그렇게 2014년 5월, 희노애락이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20대 패피들이 원하는 패셔너블한 한복

박상준 대표는 고객 한 명 한 명을 위한 맞춤형 한복을 제작한다. 제작 방식은 여러 가지다. 전적으로 박상준 대표의 센스를 믿고 맡길 수도 있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원하는 스타일에 맞춰 만들 수도 있다. SNS등을 통해 제작 의뢰를 하게 되면 직접 만나 상담을 진행하고 치수를 측정한 뒤 부자재, 원단, 색상 등을 고른다. 거리, 시간 상의 문제로 직접 만나 치수를 측정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평소 기성복을 입는 치수를 받은 뒤 그 사이즈에 맞게 한복을 짓는다.


작업은 대학 학장님의 배려로 학교 실습실에서 진행하고 있다. 졸업 전에 판을 벌리다보니 작업실을 따로 준비할 여력이 없었는데, 학장님이 ‘학교 실습실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신 것. 그는 실습실과 집을 오가며 한복 짓기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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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남정네


박상준 대표 혼자 한복을 짓는 전 과정을 진행하고 고객마다 모두 다른 옷을 제작하다 보니, 한 벌이 완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5일 정도. 주문이 밀려있을 때는 5~10일 정도까지 제작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벌당 가격은 30~40만 원 대인데, 원단의 양과 종류에 따라 가격에는 편차가 있다.


희노애락은 여느 한복집과 달리 고객 연령대가 20대 중후반으로 어린 편이다. 데일리룩으로 소화가 가능한 개성있는 한복이라 패피들의 주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번 주문한 고객은 편안하고 멋스러운 한복에 푹 빠져 단골이 된다. 중국 상해에서 푸드스타일리스트 겸 셰프로 활동 중인 그의 고객 중 한 명은 처음에는 흑색의 한복 한 벌을 주문했다가 주방복 한 벌과 하계절용, 바지, 군복 두루마기 등 때마다 여러 벌을 주문해 만족스럽게 입고 있다고.


“2015년 1월에는 평소 팬인 양동근 씨의 SNS에 ‘생활한복을 협찬해드리고 싶다’고 댓글을 남긴 적이 있어요. 제 SNS를 통해 희노애락의 한복을 보시고는 직접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2015년 KBS ‘불후의 명곡’ 설특집 무대에 입을 한복 의상을 제작했죠. 만족해 하셔서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사극 말투, ‘한복쟁이’ 너는 내 운명

한복쟁이가 된 후 그가 가장 애정하는 룩은 ‘한복’이 되었다. 상하의 세트로 맞춰 입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서양복과 믹스매치해 아방가르드한 느낌을 연출하기도 한다. 처음 그가 한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친구들은 “청학동에서 왔냐” “국악인이냐”라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내 한복입은 그의 모습을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였다. 워낙 오래전부터 ‘한복쟁이’가 될거라 선전포고하고 다니기도 했거니와, 그의 과거 패션 스타일에 비하면 한복 정도는 아주 무난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꼴Q열전] 여인네가 탐하는 남정네 한복을 짓는다, 한복쟁이 박상준

△ 박상준 대표가 데일리룩으로 즐겨입는 희노애락의 한복


“강렬한 패션을 좋아했어요. 스카프를 워낙 좋아해 목에 두르는 것은 기본이요, 터번으로 사용하거나 스커트처럼 허리에 감아 입고 다녔어요. 레깅스 패션도 좋아했죠. 그래서 한복을 입고 다닐 때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익숙하거든요. 하지만 한복을 입고 다녀도 저를 한복쟁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악인, 무용인으로 생각하세요. 그 부분은 좀 아쉬워요.”


한복쟁이가 되며 말투에도 변화가 생겼다. 공부를 위해 옛 문헌을 자주 찾아보면서 고어를 자주 접하게 됐고 눈에 익으니 입에서도 맴돌게 된 것. 그는 평소에도 ‘안된다’ 대신 ‘아니된다’, ‘감사합니다’ 대신 ‘감사하옵니다’ 등 사극톤의 옛 말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연통을 넣겠다’, ‘면전하다’ 등의 말은 사실 중학교 때부터 사용하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혼자 그런 말을 습득해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습니다. 다들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말을 쓰냐’고 의아해했죠. 언행 자체가 조금 독특한 아이였습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일본스타일로 꾸미고는 사극 말투를 썼으니까요. 하지만 평소 사극은 즐겨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일찌감치 그의 운명은 ‘한복쟁이’로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투부터 외모까지 한복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그는 요즘 댕기머리에 푹 빠져 머리카락을 열심히 기르는 중이다. 그는 “아직 길이가 짧아 어쭙잖은 상투를 틀고 나왔지만, 청학동 스타일의 5 대 5 가르마의 댕기머리를 꼭 하고 말 것”이라며 또 다른 변신을 예고했다. 그가 정갈하게 댕기머리를 땋고 강남 거리를 활보할 즈음에는 ‘희노애락’의 한복을 런웨이에서 만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희노애락’이 좀 더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선다면 개인전을 열고 싶습니다. 요즘도 길을 걷거나 SNS를 보다가 영감이 떠오르는 분들을 보면 다가가서 청을 드립니다. ‘추후에 제 모델이 되어주십시오’하고요. 여인네들은 많이 섭외가 됐는데 아직 남정네들이 부족하네요. 좀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