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
상상력 끝판왕 ‘방구석 초현실주의’ 등장!
초현실주의 작가 이기택
사진을 보는 순간 ‘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비상한 상상력에 한 번, 그 상상을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실력에 또 한 번. 스물세 살 대학생의 작품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모든 게 ‘독학’의 결과물이라면?
△ 작품명 '거인'
‘초현실주의’. ‘이걸 돈 내고 보나’ 싶을 정도로 난해하며 굉장히 기괴하고 어려운 미술. 우리는 보통 ‘초현실주의’를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기택 작가(영남대 산업디자인 3)의 작품에서 비춰지는 ‘초현실주의’는 재미있다. 빨래를 걷으며 하늘에 떠 있는 해도 함께 걷어내고,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에게 물을 따라 주기도 한다.
배경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일상이고, 한번 쯤 상상했을법한 유쾌한 발상이 실현된다. 이 작가는 “나도 초현실주의를 잘 몰라서 공부하고 있다”라며 “나의 작품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연출해 보여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내 작품이 초현실주의라고? 그게 뭔데?
이 작가가 초현실주의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은 군 복무 중이다. 자기개발시간에 딱히 할 게 없던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입시미술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할 만큼 미술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의 즐거운 취미 생활이었다. 완성한 그림은 휴가를 나와 SNS(페이스북 '작은전시공간' 페이지)에 업로드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했다. ‘초현실주의가 뭔데?’
△ 작품명 '형'. 지친 회사원의 모습을 표현했다.
“도베르만이 넥타이를 매고 있고, 그 밑으로는 축 처진 손을 그렸어요. 회사원인 형을 생각하며 완성한 그림이죠. 흔히 회사원을 ‘개처럼 일한다’고 하잖아요. 축 처진 손은 지친 몸과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작품 몇 개를 올리니 ‘초현실주의 그림이네’라는 반응이 있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에릭 요한슨’이라는 스웨덴의 예술가를 알게 됐어요.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 활동을 하는데, 거기에 완전 꽂혔죠. 그때부터 그분의 모든 작품과 인터뷰, 강연 영상을 섭렵했고 저도 한국에서 비슷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작품명 '22살 부를 가지고 싶은 욕망'. 좋은 구두가 부의 상징이라 생각하던 시절 그린 작품.
군 전역 후에는 본격적인 사진 작업에 나섰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촬영을 하고 편집해 작품을 만들었다. 사진도 배운 적 없고, 포토샵도 독학으로 익힌 것이라 ‘고퀄’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기발랄한 연출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거인이 된다면?’이라는 발상으로 만든 ‘거인’이라는 그의 첫 작품은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졌다.
“사실 전문가가 보았을 때는 형편없는 실력이죠. 그때는 카메라도 없어 휴대폰으로 촬영했거든요. 포토샵도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고요.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힘든 줄 몰랐어요.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바로 작업해 SNS에 업로드 했죠.”
거인이 돼 담벼락을 넘고, 두루마리 휴지산에 오르다
이 작가의 작품은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일상 속 흔한 풍경이 배경이 되고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상상이 구현된다. 이 작가의 집 안, 화장실, 아파트 앞 주차장, 학교 등이 단골로 등장하고 개미만큼 작아지는 일, 상어 등에 앉아 출근하는 일 등이 현실처럼 표현된다.
△ 작품명 '마그리트 사과'
“‘아이처럼 생각하자’가 제 작업의 슬로건이에요.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 시간에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대신 일상의 사물을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하죠. 가을 풍경을 보면서 ‘요정이 나무를 몰래 염색시킨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 ‘풍선이 가라앉고 내가 공중에 뜨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봐요.”
실제 작업을 하는 과정은 단순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촬영에 대한 콘티를 대략적으로 짠다. 촬영도 모델도 편집도 모두 혼자서 하다 보니 오히려 작업은 더 수월한 편이다. 머릿속에 있는 그 위치에 서서 원하는 포즈를 취해 촬영을 하고,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오면 바로 PC와 연결해 편집을 하면 된다. 사진 작업의 경우 편집은 보통 3~4시간 정도 걸리는 편.
정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일이다. 그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작품이 나오는 건 금방이다”라며 “한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 1주일에서 2주일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 작품명 '화장실'
이 작가의 작품에는 모두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인처럼 커져 아파트 담벼락을 넘기도 하고, 총으로 변하는 삼각대를 들고 진지하게 방아쇠를 당기기도 한다. 그는 “인물 없이 작업한 사진을 올릴 경우 무단으로 도용되는 경우가 많아, 저작권을 위해 작품 속 모델이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효과를 통해 초현실주의 사진이 완성됐을 때는 그 모습이 그럴싸해 감탄하게 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심오한 연기를 하고 있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작품명 '휴지산'
“처음에는 사진 찍는 게 정말 부끄러웠어요. 집 안에서 찍은 사진 작품이 많은 이유 중 하나죠.(웃음) 용기 내 밖에 나가도 아파트 주차장 정도? 제가 사는 아파트가 좀 오래된 곳이거든요. 그래서 밖에서 삼각대 놓고 찍고 있으면 주민들이 와서 ‘측량하는 거냐’, ‘땅 보러 왔냐’고 많이 물어보셨어요. 재개발되는 줄 알고 기대하신 건데, 제가 그냥 사진 찍는다고 하면 실망하고 가시더라고요.(웃음) 워낙 아파트 앞에서 많이 찍어 ‘아파트 홍보대사냐’는 말도 들었고요. 요즘은 1인 크리에이터가 많아져 부끄러움이 덜해졌어요.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히는 중이에요.”
독학으로 배운 영상, 히트다 히트~
그림으로 시작해 사진으로 인지도를 쌓은 그는 최근 영상 작업물을 통해서도 히트를 치고 있다. 사진보다 초현실주의가 더욱 극대화된 영상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재미있고 독특한 효과와 설정이 더욱 눈에 띈다. 종이에 슥슥 그린 종이비행기가 실물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휴대폰 액정을 툭툭 두드리면 물처럼 찰랑찰랑 거리는 놀라운 모습이 연출된다. 이런 다양한 영상 촬영 및 편집 기술 역시도 그가 독학으로 익힌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외국 실무자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따라했어요. 제가 필요한 특수 기술 위주로 배우다가 나중에 기본기를 익히는 방식으로 했죠. 워낙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다보니 딱 필요한 것만 배우는 게 좋더라고요.”
△ 작품명 '빨래해치우기'. 빨래 후 하늘의 '해'까지 치워버리는 모습을 재치있게 연출했다.
영상 작업은 기존의 사진 작업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꼬박 1주일을 작업해야 30초 분량의 영상물을 완성할 수 있다. 사진보다는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반응이 좋아 요즘에는 영상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기택’ 이름 석 자가 알려지자 기업에서도 협업 제의를 해오기 시작했다. 자사 제품 포스터 시안을 제작하거나, 온라인상에 노출된 재미있는 영상 광고 등을 만드는 것이다. 모 피자 브랜드에서는 전단지의 피자 사진에서 진짜 피자를 꺼내 먹는 장면을 연출해 화제가 되었고, 휴대폰에서 일회용 렌즈가 떨어져 나오는 신기한 장면도 연출했다.
“인지도가 적을 때는 한 맥주 회사의 광고 시안 작업을 하면서 맥주를 받은 적도 있어요. 너무 많이 받아 아직도 집에 남아 있습니다.(웃음) 아무래도 이런 방식의 작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비용 책정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제 뒤를 따라올 후배들을 위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는 작업을 하지 않으려고요.”
△ 이기택 작가의 프로필 사진
페이스북이 VR을 지원하면서 그는 VR작업도 시작했다. 사진을 마우스로 누르고 돌리면 360도로 사진 속 장소를 모두 볼 수 있다. 그는 “앞으로는 VR영상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한국의 VR작가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VR은 초현실주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소스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VR관련기업에서 협업 제의도 오고요. 외국에서도 많은 연락이 와요. 특히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제 한국적인(?) 배경에 많이 관심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한국을 알린다는 책임감도 막중합니다. 에릭 요한슨에게 제 작품 활동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지만 제가 한국에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그 분에게 검증받고 싶기도 하고요. 답장이 올 때까지 열심히 해볼래요.”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이기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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