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 대기업 입사 때려 치고 유럽 노숙자가 된 남자
한 시간에 버스 한 대가 지나는 시골 마을. 그곳에서 자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성공을 꿈꿨다.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집안을 일으키리라!’ 하지만 대기업 합격 통보를 받고 성공에 한 발 다가선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곳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노숙자가 됐다.
“가난하게 자란 농부의 아들이었죠. 저희 아버지는 경운기를 타고 다니실 때 다른 친구들 아버지는 세단을 타셨으니까요. 고등학교에 가서 철이 좀 들고나니 고생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내가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고3때 열심히 공부해 국립대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이후로는 대기업에 들어갈 생각만 한 것 같아요. 대외활동하고 자격증 따고 영어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박재병(28)씨의 대학생활 목표는 오직 ‘대기업 취업’이었다. 친구들이 방학동안 여행을 다니고 취미생활을 할 때도 스펙 쌓기에 몰두했다. 학군장교로 복무 중일 때도 입사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합격’의 기쁨은 컸다. 그는 대기업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고, 모두의 축하 속에 입사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불행도 함께 다가왔다.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절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버렸고, 집안에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좌절하다가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주변을 돌보지 않아 생긴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취업만 생각하느라, 가족도 친구도 돌보지 않았죠. ‘이런 상황에서 입사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꿈을 잃어버렸죠.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입사를 포기하고 바로 해외로 나갔죠.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곳, 한국 사람이 없는, 한국에서 멀리 있는 곳. 아일랜드였어요.”
대기업 버리고 아일랜드로 떠나 하루 16시간 중노동
친구에게 400만원을 빌려 아일랜드 영어학원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리고 두달치 장교 월급과 퇴직금, 보험 해약금을 모은 돈 1500만원을 들고 2014년 6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아일랜드에 도착하니 한국을 떠났다는 해방감이 몰려왔다. 통장에는 1500만원이 들어있고 더 이상 취업 준비를 할 필요도 없으니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다.
박씨는 흥청망청 돈 쓰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여자도 만나고, 클럽도 가고 파티도 즐겼다. 인생을 즐기다보니 아일랜드에 도착한지 딱 두 달 반만에 통장은 텅 비어버렸다.
△신문팔이 중인 박재병 씨
“딱 900원 남았더라고요. 한국에 연락할 수도 없었어요. 취업도 안하고 도망쳤잖아요.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 구한 일은 신문팔이에요. 잘 팔린 날에는 하루에 3만원까지도 벌었고, 안 되는 날은 아예 못 벌었죠. 그러다가 주방일을 시작했어요. 스시집에서 경력 쉐프를 뽑고 있었는데 돈이 급하니 무작정 찾아가 ‘나를 채용하라’며 베짱을 부렸죠.”
경력은 없지만 근성있는 사람을 원했던 헤드 쉐프는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박씨는 설거지부터 시작했고, 돈이 급한 만큼 매장 청소직도 함께 겸했다.
“주방 보조, 매장 청소, 신문팔이로 ‘쓰리잡’을 뛰며 월수입 260만 원 정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은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일 안하려고 외국에 온건데, 왜 나는 지금 14시간, 16시간씩 이런 노동을 하고 있을까’하고요.”
△스시집에서 갈고 닦은 솜씨로 요리 솜씨는 최고!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그는 운명을 바꿀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비오는 퇴근길에 만난 노숙자였다. 비도 피하지 않고 있는 노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왠지 모를 이끌림을 느꼈다. 박씨는 노숙자에게 다가가 ‘왜 비를 맞고 있느냐’, ‘어쩌다가 노숙자가 됐냐’며 말을 걸었고,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너무 외롭다. 좋아하는 여자와 헤어졌고 도망치듯 외국에 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쏟았다.
“노숙자가 제 손을 잡아줬는데 큰 위로가 됐어요. 동시에 노숙자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생겼죠. 그때부터 노숙자를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노숙자는 내 친구, 친구 따라 노숙 체험
퇴근 후 그는 매일 노숙자를 만나러 거리를 배회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노숙자들도 그가 담배 한 개피를 건네면 옆자리를 내주었다. 박씨는 노숙자들의 옆에 바짝 앉아 시선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어쩌다 노숙자가 됐는지’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이전의 삶은 어땠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숙자에 대한 편견은 버려~
“월드 복싱챔피언 출신의 노숙자 아저씨가 있었어요. 알콜 중독이라 늘 손에는 와인이 있었죠. 군대에 있을 때 트레이닝을 갔다가 사고로 부하를 잃었다고 해요. 그 책임 때문에 감옥에도 갔다 왔는데, 이후로 가족들이 아저씨를 외면했죠. 대부분의 노숙자는 돈이 없는데 그 아저씨는 지갑에 돈이 두둑했어요. 돈도 있고 집도 있지만 가족의 시선 때문에 노숙자 생활을 하는 거죠. 아저씨가 ”나는 외롭지 않아. 가족들도 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정말 슬프게 울었는데 마음이 아팠어요.”
8개월간 그는 100명 이상의 노숙자를 만났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봤다. ‘왠 동양에서 온 작은 남자아이가 노숙자를 만나고 다닌다.’ 좁은 아일랜드 사회에서 박씨는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가 됐고, TED 강연자로 초청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박씨는 강연 요청을 받고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고민도 생겼다. 그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직접 만난 노숙자들의 스토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나며 스스로 느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의 이야기를 내가 무대에서 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결국 그는 TED 강연을 거절했다.
대신 직접 노숙자가 돼보기로 결심했다. 공감도 못하면서 어쭙잖게 아는 척 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는 낡고 더러운 옷을 주워 입고 비상금 10유로를 주머니에 넣고, 구걸할 컵 하나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노숙자는 모두 나의 친구!
“막상 거리로 나가니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저를 사람 취급도 안했고, 시선도 주지 않았어요. ‘나는 진짜 노숙자가 아닌데’라고 생각해도 한없이 스스로가 작아지더라고요. 게다가 지나는 사람이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혹시 돈을 줄까’하고 기대하게 되는 거예요. 안주면 실망하고요.”
옷 하나 갈아입었을 뿐인데 그는 누가 봐도 완벽한 노숙자가 되었다. 노숙자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토미’라는 이름의 노숙자는 그의 행색이 안타까웠는지 같은 노숙자임에도 불구하고 밥을 사주는 아량을 베풀어 그를 울리기도 했다.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가득했거든요. TED강연 요청도 오고 유명해졌으니까요. 하지만 노숙자 체험 하루 만에 외로움이 뭔지, 내가 얼마나 작은지 뼈저리게 느꼈죠. 원래는 1주일동안 노숙자 체험을 하려고 했는데 다음날 바로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도 팬클럽이 있다! 팬클럽의 힘으로 세계여행
노숙자 체험 후 그는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노숙자를 만나도 배울 것이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더 많은 것을 배워보자는 큰 뜻이었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을 인터뷰해 글로 정리하는 일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막상 떠나려니 돈이 없더라고요. 고민 끝에 제 팬클럽을 만들기로 했어요. 연예인만 팬클럽이 있어야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아일랜드에서 노숙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을 했는데, 그걸 좋아해주신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박재병 팬클럽’을 만들고 가입이 1만~2만원을 받았어요. 또 소셜 펀딩으로도 여행 경비를 보탰고요. 그렇게 팬클럽과 소셜 펀딩을 통해 모은 돈 500만원을 들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어요.”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트럭. 대신 운전은 그의 몫.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두 달여 만에 1500만원을 모두 탕진해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열혈 팬들이 보내준 소중한 돈이니 아끼고 아끼겠다고 다짐했다. 히치하이킹은 기본이고, 남의 집에서 얹혀 자고, 얻어먹고, 심지어는 노숙을 하며 근검절약 빈티작렬 자린고비 여행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다양한 사람을 인터뷰하겠다는 여행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저널리스트’라고 새긴 근사한 명함까지 만들어 매춘부부터 엔지니어, 음악가, 기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을 만났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흥미롭긴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너무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보여주기 식으로 인터뷰를 하고, 그걸 블로그에 올리는 것에 급급했거든요. 그래서 인터뷰를 그만뒀어요. 남의 이야기 말고 내 이야기를 쓰기로 한 거죠. 내가 정말로 재미있게 느끼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그는 이후 남미를 돌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검소한 대통령이라 손꼽히는 우루과이 호세무히카대통령을 만났고, 정열의 살사를 배우고, 힙업을 자랑하며 누드화보를 찍기도 했다. 세계를 누비며 한바탕 놀고 난 그는 최근 2년간의 세계일주를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열의 살사 댄스
“누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왔어요. 온 김에 팬클럽과 팬미팅도 했고요.(웃음) 곧 다시 호주로 떠납니다. 가서 돈을 바짝 벌어서 미국 오토바이 일주를 떠날 거예요. 여행을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었어요. 숙소를 어떤 곳으로 정할지, 식사는 어떻게 할지, 어떻게 이동할지. 하지만 그 선택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더라고요. 선택에 대한 결과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해요.”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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