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명 중견배우에게는 스무 살짜리 아들이 있다. 오래 전 부인과 사별하고 그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아들 뿐. 하지만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은 혼자서는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 배우는 암 판정을 받았다.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아들의 미래.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다. 평소에 연기를 좋아했던 아들이 앞으로의 모든 일을 연기로 생각하게 하는 것.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거짓말을 한 뒤, 편의점 사장인 친구에게 부탁해 아들에게 ‘아르바이트 연기’를 가르친다. 아버지의 죽음도 아들에게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7월 29~30일 막이 오르는 한 창작뮤지컬의 줄거리다. 제목은 ‘배우수업’. 장애인 아들 역할을 맡은 배우는 실제 다운증후군을 가진 강민휘 씨다. 아버지의 친구 역시 장애인 배우인 길별은 씨가 맡았다. 길씨는 뇌병변 장애 2급. 둘은 연극·뮤지컬 등 작품 외에 최근 MBC ‘사람이 좋다’ 등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얼굴을 알렸다.


아버지 역할에는 중견배우 이지형 씨가 참여했다. 이씨는 KBS 14기 공채탤런트로 1991년부터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방영한 ‘내일은 사랑’이라는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에서 선을 보였다.


6월 14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한국장애인방송협회 사무실에서 길별은(47) 씨, 이지형(47) 씨와 함께 ‘배우수업’의 또 다른 출연자인 이예빈(28) 씨를 만났다.



“장애인에게도 돈을 줘야하냐는 말, 가슴 아팠죠”


6월 14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한국장애인방송협회 사무실에서 세 명의 '배우수업' 주연 배우를 만났다. 왼쪽부터 이지형 씨, 길별은 씨, 이예빈 씨. 사진=이도희 기자


스크린에서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겠구나


세 명의 배우는 모두 피플지컴퍼니라는 같은 기획사의 전속배우다. 2002년, 장애인 피아니스트 희야를 위한 자선행사를 운영한 피플지컴퍼니는 이후 본격적으로 장애인의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현재의 기획사 형태로 탈바꿈 했다. 2009년에는 장애인 배우 권익보호를 위해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를 추가 설립했다.


이지형 씨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활발히 배우생활을 하다가 돌연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방황하던 찰나, 종교가 그에게 큰 힘이 돼 줬다. 크리스천으로 하나님의 일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그에게 김은경 피플지컴퍼니 이사가 영화 ‘일사각오’ 출연을 제의해왔고 여기에 응하면서 그의 두 번째 배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상명대 연극과를 졸업한 이예빈 씨는 대학 졸업 후 ‘죽여주는 이야기’ ‘넌센스 2’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하지만 하루에 서너 회씩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르면서 ‘뼈가 삭는 고통’을 맛본 그는 대학로를 뒤로 하고 피플지컴퍼니 오디션 참가를 계기로 이곳의 전속배우가 됐다.



“장애인에게도 돈을 줘야하냐는 말, 가슴 아팠죠”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공연하는 모습. 사진=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 협회.



길별은 씨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다. 병원에서 진단한 발병원인은 영양부족. 형편이 어려웠던 그의 어머니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별은 씨는 언어 및 보행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그런 그의 꿈은 배우였다. 없는 형편에도 어머니는 늘 그를 업고 극장 구경을 시켜줬는데 어린 별은은 스크린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배우를 보고 ‘나도 저 안에 들어가면 걸을 수도 있고 용감하게 싸울 수도 있겠구나’라는 막연한 희망을 보게 됐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를 마주하면서 그는 현실의 한계에 부닥쳤다. 사회는 그를 ‘일도, 결혼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라고 낙인찍어버렸다. 돈벌이를 위해 아이도 가르쳐봤지만 그것도 잠깐, 학부형의 항의로 얼마 못가 그만둬야 했다. 그 뒤, 대안책으로 평소에 좋아했던 애니매이션을 배워봤지만, 그의 손은 덜덜 떨며 제멋대로 움직이기 일쑤였다. 앞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장애인 객원배우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됐다. 일반 배우 공고였다면 평소처럼 꿈도 못 꿨겠지만 장애인 배우라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오디션 장에서 만난 지원자들은 그를 주눅 들게 했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유명 배우도 많았다. 게다가 오디션이 처음이었던 그는 감독과 카메라로 둘러싸인 오디션장이 공포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 주최 측이 길 씨에게만 오디션 악보와 대본을 주지 않았다. 그만 깜빡한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이게 전화위복이 됐다.


“만약 남들과 똑같이 대본을 받아서 정해진 연기를 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대본이 없으니 자유연기를 해야 했고, 자유연기가 뭔지도 몰랐던 저는 그냥 당시 즐겨보던 드라마 대사들을 짜깁기해서 읊어댔죠. 음악도 해야 했는데 듣기만 했으니 뭘 아나요. 그냥 즉흥적으로 전영록의 ‘불티’를 부르면서 막춤을 췄는데 덜컥 합격한 거예요.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5인에 든 거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를 갈망하게 됐다. 약 일 년 간 국내 극단과 기획사, 드라마 제작사 등 홈페이지에 계속 글을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장애인 배우입니다. 제게 무대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이 피플지컴퍼니였다.


장애, 미안해하지 말아요


몸이 불편한 길별은 씨에게 무대는 꿈이자 또 어려운 공간이다. 작품을 맡으면 길 씨는 늘 연습 전 먼저 배우들을 찾아가 인사를 한다. 장애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다.


“저는 ‘버퍼링’이라고 표현하는데,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요. 이런 제 모습을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볼까,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늘 걱정이 많죠.”



“장애인에게도 돈을 줘야하냐는 말, 가슴 아팠죠”


길별은 씨와 배우 성동일 씨가 함께 연기하는 모습. 사진=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 협회.


장애는 연습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라면 3개월이면 끝날 게 4~5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그의 염려와는 달리 언제나 별은 씨를 격려해준다.


“연기는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바탕이 돼야 해요. 늘 대사를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이죠. 별은 오빠가 늘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덕분에 제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어요. 오히려 감사하죠.” 예빈 씨의 말이다.


“장애인 배우와 함께 하며 일반배우들끼리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나만 잘하면 된다’예요. 사실은 장애인 배우가 훨씬 열심히 하고 더 성실해요.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염려 때문에 더욱 자신을 채찍질 하는 거죠. 일반 배우가 본받아야 할 점도 많고요.”


덕분에 배우들은 자연히 애드리브 능력을 기르게 된다. 한 작품에서 보안관을 맡았던 별은 씨는 달려야 할 신에서 갑자기 다리 힘이 풀리는 탓에 엎어지고 말았다. 관객들도 술렁이고 동료 배우들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연스럽게 일어나 손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며 “여기에 돌멩이가 있네”라는 애드리브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배우들은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별은 씨가 버퍼링에 빠질 경우에도 상대배우가 적절히 빈자리를 매워주니 걱정이 없다. “과일이 참 싱싱해보이네요”라는 손님 예빈 씨의 대사에 과일장수 별은 씨가 잠깐 입을 떼지 못하더라도 예빈 씨가 과일을 들어올리며 “역시 맛있게 생겼네요”라고 한 번 더 감탄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늘 고맙다”는 별은 씨의 말에 지형 씨는 따뜻한 눈빛으로 맞받았다. “부담 갖지 말아요. 우리가 지방 사람에게 사투리 쓴다고 뭐라고 할 수 있나요? 마찬가지예요. 장애를 모두 인정해야지 핸디캡을 탓할 수는 없는 거죠.”


“저도 하잖아요. 젊은 친구들,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물론 일정치 않은 수입 탓에 어려움도 있다. 한때, 장애인에게는 출연료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있었다는 게 별은 씨의 설명이다. “방송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뼈아픈 말도 있었다.



“장애인에게도 돈을 줘야하냐는 말, 가슴 아팠죠”



“배우는 일반인에게도 어렵잖아요. 한 극단의 경우 소속 배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이중 몇 퍼센트를 반납하라고 하기도 한다고 해요. 장애인 배우는 오죽하겠어요. 아르바이트도 힘든데.” 현재 예빈 씨는 피플지컴퍼니의 선생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속 장애인 배우를 가르치며 많지는 않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별은 씨는 가끔 꿈 전도사로도 나서며 행복을 전파하고 있다. 그의 강연 주제는 늘 ‘불가능은 없다’다. 돈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라는 말로 도망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장애를 갖고 있는 저도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꿈과 희망을 가지세요.”


또래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예빈 씨 역시 현재의 모습에 후회는 없다. 틀에 짜인 목표는 행복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철칙. 어떤 목표를 갖든 그 목적이 행복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당부다.


지형 씨는 ‘emblepo(주목하여 보다)’라는 헬라어를 남겼다.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 모습을 보자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의 미래 가능성을 본다면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당부다. 생명도 마찬가지.


뮤지컬 ‘배우수업’은 7월 29~30일 이틀간 총 4회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CTS 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관람료는 없다. 장애인 배우를 계속 발굴하고 모집한다는 차원이다. 공연 접수는 한국장애인방송협회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