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덕후양병프로젝트 ‘더쿠(THE KOOH)’

5권보면 오덕후, 10권보면 십덕후


어떤 분야에 마니아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 일본어로는 ‘오타쿠’, 한국식으로 발음으로 ‘오덕후’다. 흔히 ‘덕후’라고 줄여 부른다. 사실 ‘덕후’라는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표현이 아니다. 어느 한 가지에 빠져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덕후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덕후들이 주인공으로 나선 TV 예능프로그램이 방송되는가 하면, 덕후를 위한 잡지까지 출간되었으니 말이다. 고성배(33) 씨가 만든 본격 덕질 장려 잡지 ‘더쿠(THE KOOH)’도 그 중 하나다.


[꼴Q열전] 십만덕후양병프로젝트 ‘더쿠(THE KOOH)’ 5권보면 오덕후, 10권보면 십덕후

△내 손을 잡아봐..더쿠 편집장 고성배 씨


본격 덕질 장려 잡지 ‘더쿠’ 세상에 나오다

모 기업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근무하던 고성배 씨는 자기계발에 힘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조금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가 관심 갖는 자기계발 분야가 조금 남달랐다는 것. 다른 회사원들이 영어, 중국어 혹은 글쓰기 등의 수업을 듣는 것에 비해 그는 작곡, 캘리그라피, 남성복 만들기 등의 이색적인 수업을 듣는데 돈을 썼다.


강연에 따라 한 달 혹은 1년을 투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거나 ‘남성복을 직접 만들어 입어야지’ 등의 목표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냥 문득 생겨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쓸데없는 학구열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그가 들었던 수업 중에는 ‘잡지 만들기’ 수업도 있었다.


“잡지를 평소 즐겨본 것도 아니고, 독립출판물이 뭔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잡지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아니더라고요. 기술 보다는 콘텐츠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수업이었죠. 5~6주 정도 수업을 했고 마지막에는 수강생이 각자 잡지 한권을 만들도록 했어요. 그 수업에서 ‘더쿠’ 창간호를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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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쿠 1~7호


잡지가 낯설었던 그는 어떤 식으로 책을 만들어야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콘텐츠로 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거다’ 싶은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하던 중 그는 평소 사람들이 그를 ‘덕후’라고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애니메이션을 유난히 좋아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나를 ‘덕후’라 부를까? 덕후는 꼭 나쁜 의미여야만 할까? 어떤 사람이 덕후일까? 그는 고민 끝에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덕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세상 모든 덕후를 위한 잡지 ‘더쿠’를 기획하게 됐다. 그렇게 2014년 4월, 본격 덕질 장려 잡지 ‘더쿠’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약속된 폐간, 10권 만들고 쿨하게 떠나련다

‘더쿠’는 매호 주제를 바꿔가며 덕후들의 습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창간호에서는 덕후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혼자놀기’에 대해 다뤘고, 2호는 덕후의 필요충분조건 ‘집착에 대해 말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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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쿠 지면 이미지(1호)


창간호에서 다룬 ‘혼자놀기’ 방법은 평소 그가 즐겨하는(?) 것들이다. 리코더로 타이타닉 연주하기, 쓰레기 수집해 이름 붙이기, 취권 51가지 동작 소개하기 등 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법적인 선 안에서 할 수 있는 집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2호는 아바타 종이인형 옷 입히기, 꿈에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 덕후 타로카드로 그녀와의 관계 점쳐보기 등의 콘텐츠를 더하며 게임북 형식으로의 파격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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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쿠 지면 이미지(1호)


3호는 ‘은폐와 엄폐’를 주제로 비, 태양, 살인마, 빚쟁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키트를 보여줬다. 독자들이 쉽게 키트 만들기를 따라할 수 있도록 재료는 모두 천원샵에서 사는 친절함까지 더했다.

‘더쿠’는 덕집장(더쿠+편집장) 혼자 만드는 1인 매체다보니 가끔은 시간의 한계 혹은 아이디어의 한계에 부딪치기도 한다. 4호는 ‘방구석 소우주’라는 심오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듯하지만 실은 덕집장의 찌질한 낙서를 묶어 만든 일러스트북. 그는 스스로 “한 권 날로 먹으려는 심산이다”라고 고백했는데, 안타깝게도 독자들은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더쿠 4호는 현재 발행된 7권의 책 중 유일하게 완판이 되지 않은, 아직도 재고가 쌓여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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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쿠 지면 이미지(3호)


5호는 ‘오컬트실전마법’으로 덕집장이 어릴 적부터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중2때 PC통신에서 직접 수집한 오컬트 자료를 묶어 5호를 만들었다. 6호는 ‘서울미스터리’로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미스터리한 장소를 소개하고 있다. 유난히 강북 지역에 미스터리 장소가 집중된 것에 대해 그는 “장소 찾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라며 “집과 서점 등 내가 주로 이동하는 동선에 있는 곳을 억지로 끼워 맞춰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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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쿠 지면 이미지(7호)


가장 최근 발행된 7호는 만화에 나오는 요리를 주제로 했다. 쿡방 등의 요리 콘텐츠가 인기를 얻자 슬며시 묻어가려는 음흉한 속셈이다. ‘원피스’에 나오는 해군카레, ‘은하철도 999’의 미소라멘, ‘스폰지밥’의 게살버거 등 만화 속에서 군침을 돌게 한 음식을 덕집장이 직접 만드는 과정을 담았다.

더쿠는 서울에 있는 독립출판 서점 15곳, 지방 서점 3~4곳에서 판매하고 있다. 계간지로 7호까지 발간된 더쿠는 1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될 예정이다. 그가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더쿠를 5권보면 오덕후, 10권보면 십덕후’라면서 딱 10권만 만들겠다고 창간호에 썼어요. 책도 300권만 찍겠다고 약속했죠. 책을 사는 분들이 ‘더쿠를 계속 모으고 싶다’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요. 그래서 발행부수를 늘리지도 못하고 10권 만들면 폐간해야 해요. 이제 3권만 더 만들면 끝이네요.”


회사 때려치우고 만든 ‘홀리데이 아방궁’, 손님은 한 달에 2~3명

지난해 여름, ‘더쿠’ 5호를 발행하고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누가 보면 잡지에 집중하기 위해서 인줄 알겠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둔 뒤 이직을 하려고 했으나 다른 여러 가지 일이 생기며 차일피일 취직을 미루고 있다. 게다가 요양 개념으로 오픈한 카페 ‘홀리데이 아방궁(서울 성동구 독서당로62가길 8)’도 운영해야해 일자리 알아볼 시간도 없다.

“벼룩시장을 보다가 임대 공고를 보고 한 번 와봤는데, 동네가 시골스럽고(?) 좋더라고요. 예전 회사가 강남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 치여 사는 느낌이었거든요. 조용한 곳을 원했죠. 그런데 사람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가 되더라고요. 한 달에 손님이 2~3명 정도 와요. 이곳 분위기와 너무 다르다보니 동네 분들도 들어오길 무서워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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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아방궁 내부 사진


카페에는 그가 수집한 책과 장난감 등의 물건이 박물관처럼 전시돼있다. 줄넘기 백과사전, 사교댄스 등의 독특한 책부터 직접 구입한 방독면, 성인영화 포스터, 오래된 장난감 등 덕후 감성 물씬 풍기는 것들이 가득하다.


카페를 둘러보며 감탄하다가 문득 하루도 아니고 한 달에 2~3명의 손님이 찾는 카페가 어떻게 1년 이상 운영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잡지 300부가 모두 완판 돼도 남는 수익은 10만 원정도니, 그것으로 생활하기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혹시 그는 세상 모든 직장인의 로망인 건물주?


“이 동네 월세가 그래도 저렴해요. 35만원이니 괜찮죠? 수입은 책 만들기나 공간 제작(대학시절 건축학을 전공했다) 등의 강연을 통해 나오죠. 지금은 주 3회 정도하는데, 더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해요. 회사 다닐 때보다 2배 이상 벌 때도 있고, 아예 수입이 없을 때도 있죠. 그래도 보통은 먹고 살만큼은 벌어요. 앞으로는 ‘덕후의 물건’이라는 빈티지샵도 온라인으로 운영할 예정이고요. 카페에 있는 덕후스러운 물건을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거예요.”


친절한 덕집장은 개나 줘! 돈도 안 되는 독자들과의 시간은 안 가질래

홀리데이 아방궁을 찾는 월 2~3명의 손님 중에는 더쿠의 열혈 독자들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독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창피한지, 카페에 와서도 그에게 알은체는 하지 않고 나중에 문자를 보내는 식이라고 한다.


“잡지 뒤에 제 연락처를 적어놨었거든요. 그랬더니 독자뿐만 아니라 이상한 곳에서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초능력을 믿냐’는 이야기도 하고, 잡지는 보지도 않고 대뜸 영화 홍보 기사를 실어달라는 요청도 와요. 그래서 최근에는 연락처를 지워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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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열심히 살지 맙시다, 우리!


7~8월 중 8호를 발행할 예정이지만 그는 현재 제작에 손 놓고 있는 상태다. 책이 3개월마다 나온다고 해서, 3개월 내내 잡지를 준비할 것이 생각했다면 오산. 그는 마감 전 한 달 정도만 바짝 잡지 제작을 준비한다. 더쿠에 애정이 있는 듯 없는 듯 츤데레 매력을 발산하는 덕집장은 폐간에 대해서도 “빨리 끝내고 싶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뭐든 하다가 안 되면 접으면 되요. 그러니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세요. 열심히 하면 기대만큼의 결과가 안 나왔을 때 실망하게 되잖아요.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러니 에너지의 40%정도만 쏟으면 좋겠어요. 저도 더쿠를 만드는데 40% 정도만 쓰고 있거든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아니, 60%라고 정정해주세요.(웃음)”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