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악필에서 캘리그라피스트로, '한글장수' 추윤호

사진 = 추윤호 제공


영화 '명량', 소주 '처음처럼', 소설 '하악하악'.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이 3가지 카테고리에도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로고의 독특한 '캘리그라피'가 모두 화제가 된 것. 아름다운 서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칼리그라피아(Kalligraphia)에서 유래한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손으로 그린 그림문자를 의미한다. 특히, 최근에는 캘리그라피가 일상 소비재의 디자인에도 활용되면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캘리그라피를 하는 사람들은 타고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일까? 대츠 노노! 악필 콤플렉스를 이기고 캘리그라피를 통해 한글장수가 되고 싶다는 홍보컨설턴트 추윤호(29)씨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콤플레스 극복을 통해 얻은 나의 꿈


학창시절 윤호 씨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자신의 필체였다고 한다. 사실 요즘 같은 워드세상에서 자필 글씨를 쓸 일은 많지 않지만 그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숙제 대부분 손 글씨를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숙제를 해도 선생님의 반응은 늘 한 가지, “성의가 너무 없다”였던 것.


“제가 모든 걸 잘하진 못해도 주어진 일은 정말 열심히 하는 편인데 학창시절 숙제를 해가면 항상 선생님이 ‘성의가 없어 보인다’고 하셨죠. 속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왜 저런 반응을 하실까 고민하고, 여쭤보니 제 글씨가 문제였어요. 전 제 글씨가 그렇게 악필인줄은 몰랐는데 남에게는 그렇게 보였나 봐요. 하지만 저는 그 콤플렉스를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새로운 도전의 계기로 삼은 것 같아요. ROTC 장교로 군 생활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서점을 주로 갔는데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 온 책이 캘리그라피에 관한 책이었어요. ‘악필인 나도 한번 글씨 좀 잘 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이제는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수단이 됐습니다.”



[꼴Q열전]악필에서 캘리그라피스트로, '한글장수' 추윤호

사진 = 추윤호 제공


3년간의 꾸준한 노력 끝에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손글씨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악필 콤플렉스는 자연히 사라졌고, 한글의 조화미에 빠져들며 많은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를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윤호 씨는 주저하지 않았다. 제대 후인 2014년 7월, 그는 무작정 혼자 간단한 필기구와 테이블 하나를 들고 인사동의 거리로 뛰어나갔다. 바로, ‘한글의 미 알리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우선 사람들에게 제가 좋아하는 일을 나누고 싶었고, 저를 알리고 싶다는 열망이 컸어요. 그래서 인사동에서 테이블 하나 놓고, 오시는 분들에게 글씨를 써드렸죠. 이름을 써달라는 분들도 있었고, 본인이 좋아하는 문구를 써달라는 분들도 많았어요. 자연히 그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 저의 캘리그라피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그렇게 매주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무대를 해외로도 돌려보자고 마음먹었죠. 장교 시절에 모았던 돈으로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해서 8월에 곧바로 LA로 떠났어요. 그때부터 200일간 13개국 32개 도시를 돌면서 봉사활동도 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달했어요. 사실, 거창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한글장수’를 꿈꾸는 제겐 꿈에 다가갔던 소중한 경험이었죠.”



[꼴Q열전]악필에서 캘리그라피스트로, '한글장수' 추윤호

사진 = 추윤호 제공


물론, 200일간의 여정 중 그저 기쁘고 보람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호 씨는 불미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진료비만 하루밤새 1200만원이 나올 정도로 위험한 사고였다. 하지만 그는 움츠리지 않았다. 하늘도 그의 편이었다.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다행히 그는 경미한 타박상만 당한 것.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그렇게 200일간 북미에서 남미로, 다시 유럽까지 그는 쉬지 않고 한글을 알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속에서 윤호 씨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실패는 나의 힘, 꿈이 있는 한 ‘직진’


“최근 남미에는 한류바람이 엄청나요. 오죽했으면 한국인이면 아무나 붙잡고 같이 사진찍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평범한 제게도 사진 요청이 쇄도했죠.(웃음) 덩달아 제가 한글로 그들의 이름을 써주면 신기해하기도 하고, 정말 좋아해줬죠. 반면, 북미나 유럽에서 만난 일부 백인들은 여전히 백인우월주의를 직간접적으로 풍기기도 했어요. 한글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도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그것도 배움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어요. 아직 제가 엄청나게 유명한 캘리그라피스트도 아니고, 대단한 성공을 한 건 없지만 계속 두들기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해요.”


200일 간의 해외 프로젝트 후 그는 한국에 돌아와 외국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에 7명의 캘리그라피 작가들과 함께 손글씨를 새긴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다방면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물론, 이런 그에게도 실패의 쓴맛도 많았다. 틈틈이 도전했던 사업은 수익성을 내지 못해 접은 적도 있었고, 처음으로 발간했던 책 ‘꿈을꿔라! 아이처럼!’의 흥행도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책 제목처럼 누구나 순수하게 아이처럼 꿈을 꾼다면 언젠가 자신의 찾고자 하는 행복에 닿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망설이고, 고민하는 순간이 오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캘리그라피를 좋아해서 관련 사업도 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거든요. 때문에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타협점을 찾기도 해요. 삶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그걸 이루는 수단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는 것. 그게 바로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앞으로도 전 세계 수 천 명의 사람에게 한글 캘리그라피를 전하면서 한글이 지닌 글로벌 경쟁력을 찾았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한글의 미적 가치를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