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5 외국인투자기업 채용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상담을 받기위해 줄지어 서있다./김범준기자bjk07@hankyung.com 2015.10.15.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5 외국인투자기업 채용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상담을 받기위해 줄지어 서있다./김범준기자bjk07@hankyung.com 2015.10.15.

사진 = 한국경제 DB


고(故) 신해철(당시 무한궤도)의 데뷔곡 ‘그대에게’가 온 거리에 퍼진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 세계적인 경기호황과 민주화 열망이 격동했던 그 시절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이 쏠리고 있다. 바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다.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청춘의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미지의 과거인 1988년. 그 당시 청춘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캠퍼스 잡앤조이>는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인 1988년 청춘들의 채용문화와 지금은 사라진 직업들에 대해 되짚어봤다.


예나 지금이나 ‘청년 취업은 역시 힘들어’


1988년은 전 세계적인 경제호황기였다. 우리나라도 88서울올림픽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이 연 10% 수준을 기록,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은 취할 수 있던 시기였다. 기자가 통계청으로부터 받은 1988년 경제활동인구조사(1988년 구직기간 1주, 2014년은 4주 적용)에 따르면 당시 ‘15세 이상 인구’(생산가능인구) 수는 2960만2000명으로, 이 중 1730만5000명이 ‘경제활동인구’(취업자와 실업자를 합친 것)였다.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자는 1686만9000명이었고, 실업률은 2.5%였다. 반면, 지난해 15세 이상 인구수는 4251만3000명이었고, 경제활동인구(2653만6000명) 중 취업자는 2559만9000명으로, 실업률은 3.5%로 조사됐다.


하지만 청년(청년고용촉진 특별법상 15~29세, 공공기관은 15~34세)들의 실업률을 비교하는 통계자료에서는 더 큰 격차를 보였다. 1988년 15~29세 실업률은 5.4%였던 것이 지난해에는 9.0%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에 20~29세 실업률은 5.0%에서 9.0%로 높아졌다. 또 30~39세 실업률은 1.6%에서 3.1%로 높아졌지만, 각각 그 해의 전체 평균보다는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실업률 자체로만 보면 지난 26년 간 청년실업률이 2배 가까이 높아진 것이다. 물론 1988년 당시에도 청년실업률은 전체 평균의 2배를 웃돌아 20대의 취업전선이 만만치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지금은 청년실업률이 전체 평균의 3배 수준에 이르러 훨씬 더 심각해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나마 당시엔 대학 수가 적어 학교와 학점 따라 취업 결정됐죠”


지금보다 비교적 경기가 좋았던 1988년에도 청춘들의 취업은 마냥 녹록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취준생들이 체감하는 취업의 무게와 비견하긴 무리가 있지만, 당시에도 고충은 있었다는 것.


현재 여행기자 겸 기사편집 일을 하고 있는 L씨(49)는 1988년 당시 교수를 꿈꿨던 사회학과 2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80년대 후반에는 요즘 청년들이 체감하는 만큼 취업이 어려웠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도 대기업이나 전문직 취업은 힘들었다”면서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들이 취업걱정을 하지만 우리 때는 대학생 대부분이 3학년까지는 학생운동이나 시위를 많이 했고, 4학년 때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그 때는 취업준비라고 해도 지금 학생들처럼 서류심사 때문에 다양한 스펙을 쌓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그저 학교, 전공, 학점, 회사 필기시험에 따라 취업이 결정됐던 시절이었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때야말로 학벌로 취업이 결정됐던 시절이기도 했구요. 때문에 일부 교수들이 학생들의 취업을 돕고자 학점을 수정해주는 경우도 공공연히 있었어요.”


30년 간 한국철도공사(KORAIL, 옛 철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K씨(53)도 “80년대 중후반, 취업을 준비한 사람들은 대개 베이비부머 끝 세대였다”며 “우리보다 10년 정도 선배들은 그야말로 취업황금기를 누렸지만 우리 땐 취업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런데도 당시에 청년들이 느끼는 취업난이 지금보다 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 일단 대학을 들어가면 어느 수준의 취업이 ‘보장’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K씨의 설명에서도 이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학이 많지 않아 취업보다는 대입이 더 힘들었던 편이에요. 특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00% 취업이 보장됐던 대학의 입학경쟁이 치열했고요. 과거 철도대학의 경쟁률도 10 대 1이 넘었을 정도죠. 대신,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웬만한 일자리는 얻을 수 있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요즘 취업준비를 하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그때도 취업이 힘들었지만, 그나마 나았던 것 같아 안쓰럽고, 또 안타까워요.”


예나 지금이나 청춘들이 짊어진 취업의 무게는 엄청나지만, 현재 취준생들이 느끼는 취업의 고통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 1988년 당시 청년들의 증언이다. 이는 2015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그토록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응답하라 1988, 채용도 응답하라”고 말이다.


지금은 역사가 된 그때 그 직업


그렇다면 1988년 청춘들은 어떤 직업을 가장 선호했을까. 이공계는 1974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중동 건설붐에 힘입어 화학공업·기계·건축공학이 득세하다가 80년대에는 전기·전자공학의 전성기였다. 90년대 컴퓨터공학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상경계에선 ‘한강의 기적’을 등에 업고 가파른 경제성장을 일궈내면서 경영학의 위세가 경제학을 누르던 시기였다.


80년대 후반 ‘3저(낮은 국제금리, 낮은 국제유가,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에 따른 낮은 원화가치)의 호황’을 틈타 증권업이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저축은행 등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상호신용금고(단자사)’도 고액 연봉으로 유명했다. 수출진흥을 위해 1975년 도입된 ‘종합상사’도 단연 인기 직종이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 공채에 지원하는 인문·상경계에선 1순위 지망회사로 삼성전자가 아니라 삼성물산을 적어내던 시절이었다.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의사 변호사 등 고액 전문직과 공무원을 선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사라진 직업들도 수두룩하다. 한국고용정보원 김중진 직업연구센터장이 조사한 ‘1988년 직업세계의 변화(쇠퇴직업:1986년, 1995 직업사전에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는 직업)’ 자료에 따르면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은 대개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업무를 사람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버스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고 버스 운전기사의 업무를 보조했던 고속버스안내원, 산업체와 기타 시설에서 내부 구내전화 이용자의 통화를 연결시키는 구내전화교환원, 착신국의 교환원을 통화하거나 직접 착신국 가입자 번호를 눌러 시외전화를 접속하거나 교환했던 시외전화교환원 등이다.


과거에는 유용하게 쓰였지만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물건과 관련된 직업들도 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대부분의 문서를 담당했던 것은 타자기였다. 때문에 80년대 후반까지 타자기조립원, 검사원, 타자원 등 타자기 관련 직업이 상당수 존재했다. 또한, 연탄제조업, 영화간판 제작원, 성냥갑제조원, 성냥검사원 등 성냥 관련 직업도 많았다. ‘전파상’이란 가게에서 일하는 TV 및 라디오 수리원 등도 이제 그 역할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밖에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가방위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기 위하여 관련과목을 전문으로 교육했던 교련교사, (지금도 가사도우미가 있긴 하지만)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직무를 수행했던 가정부, 수학여행이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광부 등도 지금은 사실상 사라진 직업들로 역사 속에 남게 됐다.


반대로 과거에는 없었지만 새로 생긴 미래 유망 직업으로는 고객 또는 유족의 의뢰에 따라 인터넷 계정, 게시물, 사진 등을 삭제 및 관리하는 ‘디지털 장의사’, 여가생활 수요 파악 및 맞춤형 여가 설계, 지역 문화자원의 종합적 활용 및 기획 지원하는 ‘문화여가사’를 들 수 있다. 이혼 과정과 이혼 후 삶, 자녀 양육, 이혼 전후에 대한 심리적·경제적 상태를 돕는 ‘이혼 플래너’, 빅데이터를 수집·저장 및 처리하고, 플랫폼 개발·분석한 결과를 제공하는 ‘빅데이터 전문가’ 등도 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