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ities
콜럼버스와 화이부동
같지 아니하여도 조화롭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사건은 미국 탄생의 토대라는 긍정적 부분도 있지만 약탈이라는 부정적 부분도 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시오.
(2015 상반기 현대자동차 HMAT 역사에세이 문항)
<논어> ‘자로’편의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를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군자는 조화롭되 획일화하지 않고, 소인은 획일화하되 조화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세상의 기업과 국가는 글로벌을 부르짖으며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해가고 있다. 국가와 기업은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오로지 외형적 확대에만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는 인간의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기다. 그런 시각에서 2500년 전 공자의 ‘화이부동’은 인간의 이상적 미래사회를 함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미명 아래 이미 거주하던 토착민을 약탈했고, 결국 멸종시켰다. 그것은 문명의 힘을 이용한 분명한 폭력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고대부터 이곳에 살던 원주민이 있었고, 그들 고유의 삶이 있었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기존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획일화했다. 지금 세계는 획일화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전 세계적인 자연재해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의 갈등은 그 대표적 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획일화’의 광란에 희생되고 있나.
콜럼버스식 계몽주의 대신 공자의 ‘화이부동’을
21세기는 다양성의 시대이고, 양에서 질로 이동하는 시대다. 하지만 아직도 외형적 확대에만 관심을 가지고 오로지 획일화하려는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과거에는 고속도로를 만들 때 오로지 직선의 효율성만 고려해 산을 뚫고 강을 막았다.
자연은 단순히 인간의 필요에 따른 조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길을 만들 때도 자연을 생각한다.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강을 우회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먼저 생각한다.
인간은 크게 보면 자연의 일부다. 결코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강자는 약자를 통해 살아간다. 모두 강하거나 자연 없는 인간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강자와 약자가 어우러져야 세상이 돌아간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계몽적 사고에 길들여져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통일하려 했던 것이나, 칭기즈칸과 알렉산더의 정복행위가 인간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죄 없는 무수한 사람이 살해당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공자의 ‘화이부동’을 다시 읽고 생각해야 한다. 콜럼버스식 계몽주의는 ‘나는 우월하고 타인은 미개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제는 이런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한다. ‘나와 너는 다르고, 그 다름은 상호보완적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한다.’
글 이동우 롯데중앙연구소 HR Leader
정리 이도희 기자
온라인에디터 jobnj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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