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박정헌

200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곳곳에 불을 밝힌 꼬마전구와 들려오는 캐럴이 전하는 송년 분위기는 두 산악인의 마음도 들뜨게 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괜한 연말 분위기에 휩쓸렸던 건 아니다. 박정헌 대장과 최강식 대원 두 명으로 단출하게 꾸려진 촐라체 등정팀의 마음은 이미 한국의 겨울을 떠나 히말라야의 빙벽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 원정은 그때까지의 삶과 이후의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12 월 24일 네팔행 비행기로 출국한 박정헌 대장과 최강식 대원은 이듬해 1월 16일 드디어 히말라야의 촐라체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 촐라체는 네팔 동부 쿰부 지방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6400m다. 8000m급이 즐비한 히말라야에선 비교적 높지 않은 고도.

하지만 해발 4900m 지점부터 정상까지 이르는 깎아지른 거벽은 산악인들에게 그야말로 도전과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겨울철의 촐라체 북면은 석 달 내내 햇빛 한 점 들지 않아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신의 영역이었다. 그나마 박 대장 팀 이전에 북벽을 오른 이들은 1995년 프랑스 팀뿐이었고, 이들도 겨울은 피했다.

한국의 산사나이들이 촐라체 겨울 북벽 초등에 성공한 것은 한국 산악 등정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산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고통으로 일그러진 육신,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턱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촐라체 북벽 등정 후 찾아온 사고

‘아이젠’은 겨울철 산행을 위해 착용하는 등산 장비다. 등산화에 부착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역할. 하지만 때론 아이젠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커지기도 한다. 스파이크 사이에 눈이 차는 ‘스노볼’ 현상 때문이다. 2005년 1월의 사고도 바로 이 아이젠과 스노볼에서 시작됐다.

“크레바스라고 하죠. 빙하의 균열로 생긴 낭떠러지인데, 후배 강식이가 스노볼 때문에 미끄러져 23m 깊이의 크레바스에 추락했어요. 위험 지역에선 한 명이 빠져도 서로 잡아줄 수 있게끔 로프로 서로를 묶습니다. 덕분에 죽음을 면했죠.”

로프를 잡아당겨 동료를 구하는 게 다음 수순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후배의 두 다리는 이미 부러진 상태였고, 박 대장 역시 사고 순간 목과 가슴을 누른 자일의 충격으로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사고의 여파로 잠시 의식을 잃었을 정도.

최 대원이 노파심에 챙겨온 등강기 덕분에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크레바스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부러진 다리와 갈비뼈, 엄습해오는 동상, 여기에 눈에 비친 강한 햇빛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설맹까지 겹쳐왔다.

기다시피, 구르다시피 내려온 길. 눈에 박아두었던 바일이 뽑히면서 박 대장의 눈두덩을 강타해 5cm가 넘게 찢기는 아찔한 사고까지 이어졌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이틀에 걸쳐 하산한 이들은 야크를 키우는 노인에게 발견되었고, 실종 신고를 받은 수색대의 헬기 소리에 비로소 처절했던 생사의 무대를 떠날 수 있었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살기 위해 자일을 끊어야 하나’를 고뇌했을 정도의 사투 끝에 건진 목숨. 하지만 생존의 대가는 처참했다. 박 대장은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한두 마디씩 잘라냈고 양쪽 엄지발가락도 조금씩 절단했다. 최 대원은 더했다. 엄지손가락 한 개를 제외한 9개의 손가락과 양 발가락 모두를 절단해야 했던 것. 겉으로 드러난 뼈를 보호하고 가리기 위해 몸 곳곳의 살을 떼어 이식하는 대수술이었다.

“2박 3일간 걷고 기어서 내려왔어요. 수술 얘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기분 더러웠죠. 마음을 정하기 힘들어 수술을 한 차례 미루기도 했고요. 돌이켜보니 ‘20년 동안 내 손가락을 너무 혹사시켰구나’,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하늘에서 이 손가락을 쓸 데가 있나 보다. 이젠 쉴 때가 됐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자 고통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더군요.”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까까머리 고등학생, 히말라야에 오르다

1971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42세. 그런데 박 대장은 등산 경력만으로는 30여 년에 가까운 한국 최고 베테랑 가운데 한 명이다. 앞으로는 드넓은 바다, 뒤로는 한국 암벽등반의 메카인 와룡산 상사바위가 버티고 선 경남 사천의 삼천포.

물과 산,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천혜의 고향 풍광 중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산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캠핑 장비를 사러 들렀던 등산용품점에서 만난 선배의 권유로 산을 타기 시작한 것. 중학교 2학년 까까머리 학생 때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등산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한국등산학교를 졸업했다.

본격적인 고산 등정은 1989년 히말라야 초오유(8201m)에서 시작됐다. 그때가 고등학교 졸업 직후. 채 스무 살이 안 된 나이에 히말라야에 도전한 기록은 당시 산행에 함께했던 친구와 그가 처음이었다. 첫 도전은 실패의 쓴맛을 안겨줬다. 셰르파 한 명이 눈사태로 추락사하는 아픔까지 겪었다. 함께했던 친구는 “다시는 산을 안 타겠다”는 말을 남겼고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고 있지만 박 대장은 처음 만난 산을, 히말라야를 떠날 수 없었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친구가 현명한 선택을 한 거죠. 전 뭔가에 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후에도 클라이밍에 열중했어요.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최연소로 등정한 기록도 있었고요. 그러다 결국 다시 산을 다시 찾은 거예요.”

히말라야의 최고 난벽 중 하나로 꼽히는 안나푸르나(8091m) 남벽 등정에 셰르파 3명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성공한 것이 1994년이었다. 지난해 10월 또 한 명의 세계적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실종된 곳이 바로 이 안나푸르나 남벽이다.

안나푸르나 등정을 시작으로 박 대장은 한국 산악사를 새로 써내려가며 승승장구했다. 199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에 성공했고, 1996년에는 초오유 티베트 루트와 시샤팡마 중앙봉에도 올랐다. 1996년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인 몽블랑 프레니 필라(기둥바위)를 동양인 최초로 올랐고, 이듬해 낭가파르밧(8125m) 등정 성공 등 거침없는 행진이었다.

1999년에는 드디어 K2 등정에 나섰다. K2는 높이로는 에베레스트 다음이지만 험난한 산세로 산악인들 사이에선 ‘신들의 영역’으로 불리는 산이다. 박 대장 역시 첫 번째 도전에 실패한 후 2000년 재도전 끝에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남남동릉을 통한 무산소 등정(산소통 없이 등정)으로 8명이 함께 정상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2년에도 기록 행진은 이어졌다. 자기만의 루트를 개척하는 일은 산악인들 사이에선 일생의 꿈이다. 박 대장은 시샤팡마 남서벽에 ‘코리안 하이웨이’라는 이름의 신(新) 루트를 뚫는 데 성공했다. 8000m 이상의 고봉에 한국인이 처음 개척한 루트였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한국 최고의 ‘등로주의’ 산악인

“요즘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히말라야 등정은 5성급 호텔 숙박이나 다름없어요. 텐트 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호텔이란 뜻이죠. 촐라체 같은 경우 텐트는 고사하고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어요. 잠도 로프에 수직으로 매달려 자니까요. 그만큼 경사가 심하다는 뜻이죠.”

그러고 보니 30년 가까운 등산 경력에도 그의 프로필에는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나 ‘산악 그랜드슬램’ 같은 기록은 없다. 대신 ‘무산소, 동계 최초, 알파인·초경량 등반’ 같은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이른바 ‘등로주의(登路主義)’다. 박 대장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제외하곤 모두 무산소로 등정했다.

등로주의의 상대어는 ‘등정주의’다. 대규모 인원과 물량을 동원해서라도 등정 자체에 의미를 두는 스타일을 말한다. 등로주의는 말 그대로 산에 오르는 방법과 과정을 더 중시한다. 최소한의 인원이 최소한의 장비로 신속하게 치고 올라가는 스타일이다. 고정 로프나 사전 탐사도 없이 무산소로 오르는 알프스식 등정 방법을 일컫는 ‘알파인(Alpine) 등반’의 최고봉 중 한 명이 바로 박 대장이다.

“셰르파 없이 배낭 하나 메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올라야 해요. 등산의 가치를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자 클라이머에게는 자존심과도 같은 스타일이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연과 일대일로 만나는 등반, 생각만 해도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무산소 등반은 100m 달리기를 계속하는 느낌과 비슷해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죠. 보통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까지 1~2km에 불과하지만 그 거리를 12시간씩 오르는 겁니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지구상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히말라야만큼 아름다운 곳을 보지 못했다.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가 산을 올랐던 이유다. 하지만 산악인에게 손가락이 없다는 현실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손가락을 잃은 것과도 같은 치명상이었다.

“충격과 좌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거기서 헤어나오기 위해 자전거로 실크로드 횡단에 나섰어요. 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 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005년 7월 후배 두 명과 출발했습니다. 말이 자전거지 석 달간 4000m 고도의 히말라야를 넘는 일이었어요. 고생고생하며 페달을 밟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러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죠. 방황의 이유는 ‘목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히말라야에는 8000m급 봉우리가 14개, 7000m급은 200개가 넘는다. 박 대장식 표현으로는 ‘그만큼 수없이 많은 목표가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산에 관한 새로운 목표를 찾기 위해 3년여를 히말라야에서 어슬렁거렸다. ‘왜 나는 산에 가는가’에 대한 대답은 결국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남들과 똑같은 도전은 싫다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패러글라이딩이 떠올랐어요. 본래 패러글라이딩 자체가 하산을 위해 개발된 장비라 저도 1994년부터 배웠던 터였죠. 결국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 히말라야 횡단을 계획했어요.”

히말라야 패러글라이딩은 영국의 존 실베스터 등이 이미 시도한 적 있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시샤팡마(나머지 봉우리들과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를 제외한 나머지 13개 봉우리 전체를 횡단한다는 건 박 대장이 아니었다면 거론조차 되지 않았을 도전이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오르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그다운 발상이었다.

패러글라이딩이라 해서 편하게 산바람 맞으며 나는 것쯤으로 치부하면 오산이다. 최고 높이 6100m의 고도에서 직선거리로만 길게는 108km를 날아야 한다. 이 경우 실제 비행거리는 250~300km에 달하고, 최고 속도는 시속 70km, 비행시간은 4시간에 이른다. 살인적인 바람을 맨몸으로 버텨내며 지상에서 데워진 열기류를 이용해 순수한 자연의 힘으로만 날아가는 방법이다.

“공중에서 물도 먹고 바나나도 까서 먹고, 촬영도 해야 하죠. 두둥실 떠다니는 레포츠와는 차원이 달라요.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다시 닿을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그래서 등반은 육체 스포츠, 패러글라이딩은 멘탈 스포츠라고도 하죠.”

13개 봉우리 전체를 횡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6개월.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남풍이나 히말라야 속의 열기류를 이용하다 보니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됐다. 히말라야 횡단은 패러글라이딩 기술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히말라야 자체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지식, 막대한 경비, 팀워크가 갖춰진 팀 등이 모두 해결돼야만 가능한 엄청난 도전이다.

“사고 전에는 무조건 오르는 게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하늘에서 본 히말라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이제야 좀 히말라야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할까요. 그곳에 사는 사람과 동물, 자연을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이제야 알게 됐으니 계속 도전해야죠.”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지금 당장 여행 떠나라!

박 대장은 2년 정도 후부터 다음 도전에 나설 예정이다. 히말라야 북쪽 면을 자전거와 카약 등을 이용해 횡단한다는 계획. 지금 당장은 그의 삶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될 작업에 한창이다.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라 이름 지은 박물관 개장이다.

히말라야에 자리 잡은 티베트 왕조의 ‘네와르 건축양식’은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정교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박 대장은 자비를 털어 네와르 건축양식을 보여줄 예술품 3톤 분량을 현지에서 공수해와 경남 진주에 박물관을 열었다. 창호, 가구(문갑·의자 등), 동제품(촛대 등), 불교제품, 생활용품 등을 32평의 공간에 전시한 것. 300년이 넘은 나무기둥 같은 진귀한 물건을 비롯해 티베트 최고의 조각가가 작업한 3단 창호는 전 세계에 단 세 점뿐인 명작으로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명품이다.

“유리벽 속에 갇힌 박물관보다는 사람들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길 원해요. 그래서 모든 전시물을 그대로 노출했죠. 히말라야의 예술가들은 문명을 원하고 문명인들은 과거를 원하더군요. 그 사이에 우리 박물관이 있는 겁니다. 그동안 제가 받아온 고마움을 갚기 위한 영혼의 쉼터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나의 꿈 나의 길] “남이 가지 않는 길, 그게 바로 내 길”
박 대장은 박물관을 법인으로 등록할 계획이다. 히말라야의 숨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이를 통해 기부도 이어나갈 예정. 히말라야에 도서관을 짓고, 탐험가 유가족 생계 해결 등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여행을 많이 하세요. 대기업 신입사원 강연에서도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여기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대학에 가기까지는 ‘공산당’ 같은 세월이죠. 부모가 주는 밥에 하나의 목표만 향해 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대학은 물론 대학원을 나와도 할 게 없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는 세상에서, 그만큼 많이 보고 다니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걸 모르죠. 남이 가지 않는 길, 남이 따라올 수 없는 길을 걷는 것, 그게 바로 경쟁력이에요.”



글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사진제공 박정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