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산의 한 대형 백화점 상담직원 A(28) 씨는 2년 전만 해도 예쁘고 세련된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백화점 정직원으로 입사해 월급도 꽤 많이 받았던 그녀는 어느새 구찌, 루이비통, 페라가모 등 ‘명품’ 가방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명품을 살수록 더 많은 소비욕이 일어났고, 그녀는 신용카드를 여러 개 만들어 돌려막기를 통해 명품 섭렵에 나섰다. 결국 A 씨는 2009년 말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1일 오전 1시 50분쯤 그런 A 씨가 부산 시내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쿠키뉴스, 2011. 3. 2)”

이 기사 속의 여성처럼 명품 중독에 빠진 ‘소비 인간’은 자칫 개인을 황폐화시키고 극단적으로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다. 명품 중독은 개인이 자초한 것이지만 사실 자본과 미디어가 공고하게 얽혀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이 여성이 자살로 삶을 포기하게 한 주범은 바로 명품 중독을 만드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값비싼 명품이라도 막상 손에 넣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큰둥해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에게는 승용차, 여성에게는 핸드백만큼 욕망을 부추기는 대상도 없다. 처음에는 소형이나 중형 승용차를 몰다가 외제 승용차를 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고급을 찾게 된다.

끝없는 욕망이 이어진다. 어쩌면 그 욕망을 따라가다 삶이 다할지도 모른다. 핸드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가의 명품 핸드백을 손에 넣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다른 명품 핸드백으로 관심이 이동한다. 그 핸드백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한다.
[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잇 아이템’, 이 매혹적인 ‘껍데기’야!
자동차와 핸드백의 공통점

현대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잉여쾌락’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잉여가치’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했는데, 슬라보예 지젝은 소비사회로 지칭되는 후기산업사회는 ‘잉여쾌락’이라는 욕망의 구조에 의해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잉여쾌락이란 욕망이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도달한 바로 그 순간 그것을 덧없게 만드는 욕망의 또 다른 부분이다. 처음 원했던 욕망에 도달하면 다시 다른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게 되고, 이것이 현대 소비사회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끝없는 욕망이 끝없는 소비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젝의 ‘잉여쾌락’ 개념은 마르크스의 상품분석에 나오는 ‘잉여가치’를 대체한 개념이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잉여쾌락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나 자동차처럼 멀쩡하게 사용하고 있는 상품도 ‘신상’이 나오면 또 그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

존 듀이는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충동은 ‘인정받는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the desire to be important)’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명품을 걸치고 외제차를 타는 것도 바로 이런 욕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차이에 대한 욕구’라고 표현한다. 내가 이것을 소비함으로써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기호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다. 차이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사회적 관심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추위에 떨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의실종’에 집착한다. 발이 망가지고 다리가 아파도, 하지정맥류에 걸려도 하이힐에 집착한다. 아무리 부작용을 얘기해도 소용없다. 이는 다른 여성들과 차이 나는 소비를 위해서다.

더욱이 요즘과 같은 시각영상매체 시대에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을 소비하기 위해 노력한다. 연예인들이 하이힐을 신고 하의실종 패션을 입은 것을 보면 이를 모방한다. 연예인들의 이른바 ‘잇 아이템’이 미디어를 통해 보이면 대부분 여성들의 ‘잇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패션 잡지에 실린 ‘잇 백’ ‘잇 슈즈’ 등에 관심을 쏟는다. 잇 백(it bag)은 직역하면 ‘그 가방’인데 이는 할리우드 스타 같은 유명인들이 들고 다니는 바로 그 가방이라는 뜻이다. 패셔니스타라면 꼭 가지고 다녀야 할 가방으로 해석된다.

패션 잡지에서 ‘잇 백’을 보면 ‘이 기사를 읽는 독자 여러분은 이런 잇 백 한 개쯤은 가지고 계시겠죠?’라고 물어보는 의미로 느껴진다. 즉 “이 잡지를 볼 만큼 세련된 여성이라면 잇 백 정도는 가지고 있다”라는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잇 아이템’에 집착할수록 여성들의 ‘차이의 소비’는 사라진다. 차이 나는 소비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모두가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제 루이비통 핸드백은 (진품이든 짝퉁이든) 대부분의 여성이 소유하고 있다. 차이 나는 소비가 역설적으로 차이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차이에 대한 욕구’가 차이를 없앤다

그런데 극단으로 차이를 추구할 경우 ‘소비 거부’나 ‘반소비’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과시하거나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태도와 검소함, 겸손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교묘하게 다를 뿐 결국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TV에서 그의 생전 공연 모습을 특집방송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때 특이한 것은 마이클 잭슨의 ‘찌질이’표 의상이었다. 러닝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후줄근한 패션이었다.

그게 오히려 자신을 더 드러내고 과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반소비’다. 또 다른 ‘차이의 소비’인 것이다. 누구나 럭셔리한 의상을 입으면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소비 패턴을 ‘차이에 대한 욕구’로 명쾌하게 정리한 장 보드리야르는 “중간 계급은 오히려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자신이 하류 계층으로 보일까봐 오히려 더 과시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로 이런 유형의 전형이라고 분석한 글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과시용 소비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돈을 보기가 무섭게 썼다. 또 앞으로 들어올 돈을 상상하면서 당겨썼다. 그는 상류층 자제들처럼 돈을 써댔다.

오페라와 샴페인과 카드게임.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혹은 기분이 나빠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턱턱 쓰는 돈. 아쉬운 것 없이 자라난 공작 가문, 백작 가문 청년들도 그처럼 돈을 흥청망청 쓰지는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작품을 분석한 석영중 고려대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반면 상류 계급은 오히려 ‘과소 소비’를 하기도 한다. 리스먼은 상류 계급이 이 과시적인 과소 소비 전략을 통해 출세 제일주의자들에게 ‘우리는 너희 졸부들과 다르다’는 일종의 시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졸부와 한 묶음으로 취급되는 게 싫어 경계선을 그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중산층은 가난하다는 인상을 줄까봐 더욱 정도를 넘은 과잉 소비에 집착하는지 모른다. 진짜 부자는 돈을 펑펑 쓰지 않는다는 말은 중산층의 과잉 소비를 비웃기 위한 것일 게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여학생들이 명품 핸드백에 명품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다. 책을 넣는 가방이 없고 루이비통 핸드백과 ‘샤넬(CHANEL)’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들고 있다. 거기에 책 한두 권 넣고 다닌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이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취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이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어떤 이미지나 실체의 복제물에 불과한 이 시대에….”

김영하의 소설 ‘겨울에 대한 명상’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실체보다 이미지가 더 실제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껍데기의 삶이다. 껍데기에 매혹되면 진짜 얻고자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없다.

[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잇 아이템’, 이 매혹적인 ‘껍데기’야!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겸 자녀경영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 다수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