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전공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갈색 눈의 파우저 교수가 묻는다

당신은 어디서 희망을 찾는가? 먼저 길을 간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는 이도 있지만 오히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에서 유일한 외국인 교수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의 삶은 후자에 가깝다.

미국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엔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최초로 ‘교양 한국어’ 강의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미국인 교수는 그가 유일했다. 지금도 그는 서울대에서 ‘한국어 교육법’을 가르치는 유일한 외국인 교수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었기에 그의 삶에는 항상 ‘최초’, ‘유일’이라는 이름표가 따라붙는다. 그 갈채의 이면에는 고독감도 따랐을 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나약하면 자기 뜻대로 꿈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어지죠.”

낯선 한국 사회에서, 그것도 폐쇄적인 국어교육학계에서 교수가 되기까지 그의 삶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사실은 굉장히 오래전 얘긴데요….” 한국 그리고 한국어와의 인연을 꺼내는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꿈 위해 홀로 설 자신 있습니까?”
1970년대 후반 일본 도쿄. 역 앞에 선 열여섯 살 미국 소년의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시선은 도심을 바쁘게 오고 가는 인파에 꽂혀 있었다. 작은 체구의 소년은 미국 중부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 앤아버(Ann Arbor)에서 태어난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홈스테이’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가 살던 앤아버는 총인구의 80%가 학사, 30%가 석사일 정도로 학력이 높은 대학촌이다. “이웃에 교수가 많아서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다 교수가 되는구나’ 생각할 정도였어요.” 공부하는 어른들을 보며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직업을 꿈꾸게 됐다.

그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파병된 군인이었다. 아버지가 2년간 머물렀던 일본 교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린 시절 즐거운 일상 중 하나였다. “교토의 전통 건축물과 일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본이 어떤 나라일까 궁금했죠.”

지리학을 전공한 어머니는 “세계를 향해라, 세계를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고등학생 때는 일본어 한마디 못하는 그를 일본에 보내 ‘홈스테이’를 경험하게 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 살던 그가 지구 반대편 아시아로 진출한 데에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동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시간대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일본인인 나가라 교수에게 ‘수제자’ 칭호를 받을 정도로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 안 하는 학생에겐 큰 소리로 혼을 내는 분이셨죠. 예의를 중시한 교수님 덕분에 학과 전체에 동양적인 분위기가 생겼어요. 미국 학생들이 적응하기엔 쉽지 않았지만 그때 몸에 밴 예절이 나중에 일본이나 한국에서 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국의 역동성을 발견하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꿈 위해 홀로 설 자신 있습니까?”
파우저 교수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스물한 살인 1982년. 일본 어학연수 중 비자 연장 문제로 잠시 들렀었다. 그는 “88서울올림픽 준비로 바쁘던 서울 시내가 마치 ‘거대한 공사판’ 같았다”고 회상했다.

“무언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더 인상적이던 건 한국 사람들의 적극성이었죠.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은 좀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그랬는지 먼저 다가와 말을 걸더군요. 기차 안에서 김밥도 주고 귤도 주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이듬해인 1983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울대 어학연구소(현 언어교육원)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1987년엔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 5년간 영어 강사로 일했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민주화 운동도 목격했을 터. “경찰이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끌고 나가는 것을 보고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때 한국 사회 밑바닥에 깔린 변화의 에너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 가출 후 상경한 친구가 있었어요. 공장에서 일하면서 밤새 공부해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온 친구였어요.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인생을 개척한 거죠. 대학 교육이 보편화된 시기의 세대여서 그런지 당시 대학생들은 사회 변화를 이끌겠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1997년 IMF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한국의 저력을 믿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있었는데 모두가 한국이 끝났다고 말할 때도 나는 한국은 다시 살아날 거라고, 지금이 한국 주식을 살 때라고 말하곤 했죠.” 한국 사회의 변화하는 힘, 역동성은 기나긴 일본 생활에서도 한국을 그리워한 이유였다.

한국어는 한국인만 가르칠 수 있다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한국의 교수 자리를 꿈꿨지만 보수적인 학계에선 외국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이스트에서 계약 강사로 일할 때 한국에서 교수가 될 수 없을 거란 얘기를 들었죠. 외국인에게는 전임교수 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는 게 낫다고 했어요. 나이 서른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자리가 없으니 결국 떠나야 했죠.”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 교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화는 계속 개방되는 추세였고 시대가 변하면 외국인은 교수 못한다는 폐쇄성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것. 일본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어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지난 2006년 일본 가고시마대에 ‘교양 한국어’ 강의를 개설했다. 그 대학에 한국어 강의가 생긴 것도 처음,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미국인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처음이었다.

“보통 모국어를 더 잘 가르칠 거라고 생각하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가르칠 자신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배운 언어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낄지 잘 알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데에는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험이 큰 몫을 했다. 2008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말이다. 작은 마을에 살면서도 넓은 세상을 보길 원했던 어머니의 가르침이 꿈으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는 아직 “국어에 대한 폐쇄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영어 가르치는 사람 중 90%가 비영어권 사람이에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한국어는 왜 한국인만 가르쳐야 하나요? 한국어 교육에서도 외국인 강사 비율을 높여야 합니다. 좋은 외국인 한국어 강사를 양성해야 한국어의 범위도 넓어지는 거죠. 만일 영어권 나라에서 ‘영어는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라고 했다면 세계 공통어가 됐을까요?”
[나의 꿈 나의 인생] “꿈 위해 홀로 설 자신 있습니까?”
대학생들이여, 사고의 틀을 깨라

파우저 교수가 바라본 요즘 대학생들의 모습은 어떨까?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을 보고 느낀 점을 물었다. “학생들이 다양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게 가장 안타깝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양하게 진로를 개발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저마다 꿈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자립심이 사라지고 스스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어진 것 같아요.”

생활 패턴, 취미, 공부, 사고방식까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대학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당당하게 찾아갈 것을 주문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스펙을 만들고, 남들이 가는 기업에 들어가고, 편하게 만들어진 길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한국인도 아닌데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남들이 하는 일만 했다면 지금처럼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당장 눈앞에 있는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나의 일’을 찾고 인생을 길게 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도 용기 있게 걷기 바랍니다.”

토익, 학점 등 스펙으로 일원화된 기업의 입사 시험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한국 기업에 이상한 관료주의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모든 지원자는 기본적으로 토익 점수를 제출해야 하죠. 그런데 어떤 기업에서는 영어 점수로 사원을 뽑아놓고 실제로 일은 중국에서 한대요. 중국 직원과 커뮤니케이션하려면 영어보다 중국어 능력을 봐야 하는데 왜 다 영어로 뽑을까요?”

다양성이 부재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미래의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걱정을 했다. “미국에서는 내가 제3세계 언어를 전공한다고 해도 되묻지 않아요. ‘다들 스페인어 하는데 왜 넌 일본어를 해?’ 이렇게 묻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 겁니다. 자기 선택에 대해 눈치 보는 게 별로 없어요. 한국에서 페이스북이 나오고 애플(Apple)사가 나오려면 다양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다양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도 그것을 키워낼 수 없습니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Think Out of the Box).’ 파우저 교수는 마지막으로 애플사의 광고 문구를 예로 들었다. “한국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해외로 나가서 시각을 넓히고 많은 경험을 하길 바랍니다. 할 수 있는 일만 하려고 하지 말고, 무리해서라도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달성하려고 노력해봤으면 해요. 한국 청년들에겐 자신감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자신감은 경험을 통해 쌓아야 합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로버트 파우저

[나의 꿈 나의 인생] “꿈 위해 홀로 설 자신 있습니까?”
미국
1961년 미시간주 앤아버 출생
1983년 미시간대 일어일문학과 졸업
1985년 미시간대 응용언어학 석사

일본
2000~2002년 가고시마대 영어교육 교수
2002~2006년 교토대 영어교육 교수
2006~2008년 가고시마대 한국어 교수
아일랜드
2001년 더블린대 트리니티 칼리지 응용언어학 박사

한국
1983~1984년 서울대 어학연구소(현 언어교육원) 한국어 학습
1987~1988년 카이스트 영어강사
1988~1992년 고려대 영어교육과 강사
2008~현재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또 다른 이름 ‘박우주’ 그리고 한국어

[나의 꿈 나의 인생] “꿈 위해 홀로 설 자신 있습니까?”
‘박우주’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한국식 이름이다. 2008년 가을 한국에 부임했을 때 동료 교수들이 회식 자리에서 선물한 것이다.

“내 성인 파우저(Fouser)와 비슷한 발음을 딴 이름이에요. ‘우주’는 글로벌한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보편적으로 통하는 국제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래요.”

자랑스럽게 이름의 뜻을 설명하던 파우저 교수가 장난스럽게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우주’는 ‘술친구’라는 뜻도 되죠. ‘벗 우(友)’에 ‘술 주(酒)’ 자를 쓰면요.”

외국인이어서 인터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란 걱정은 기우였다. 일상회화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이슈에 대해서도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갈 정도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한국어의 중의성까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그에게 “한국말을 잘 아시네요”라는 칭찬이 되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가장 놀라운 점은 미국인 특유의 강한 억양을 거의 없애고 한국인이 듣기에 어색하지 않은 톤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어 사용자가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바로 ‘억양’이다. 강한 영어식 억양은 톤이 거의 없는 한국어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발음 역시 정확한 편이었다. ‘독특하다’, ‘때문에’처럼 영어에서 구분하지 않는 격음과 경음을 거의 완벽하게 구분해냈다. ‘관료주의’, ‘서열’처럼 이중모음이 포함된 단어를 발음할 때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386세대’, ‘융통성’과 같은 고급(?) 어휘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밑바탕이 된 듯했다. 꿈을 갖지 못하는 대학생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꿈이 없다’고 하지 않고 ‘있는지 없는지 애매하다’고 말했고, 조기 영어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할 땐 ‘다른 커리큘럼과 연계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돌려 말했다.

‘없다’라는 직설적 표현 대신 ‘애매하다’ 또는 ‘모르겠다’고 우회적으로 말하는 모습은 이미 한국인의 어법을 체득한 ‘한국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장소협조 락고재(서울시 종로구 계동 98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