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프로그램은 ‘서울여대 세계문화체험’의 일환으로, 나를 포함해 총 8명의 서울여대 학생이 필리핀에 파견됐다. 2월의 필리핀은 건기여서 생각보다 덥거나 습하지 않아 활동하기에 더할 수 없이 적합했다. 첫 일정은 ‘PUP 학생들과의 문화 교류’ 프로그램이었다. 서울여대 팀원 8명과 PUP 영문과 학생 8명이 짝을 지어 5일간 함께 활동했다. 필리핀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6년, 고등학교 4년 총 10년으로, 만 16세부터 대학생이 되기 때문에 짝이 된 버디들은 우리와 많게는 여섯 살까지 차이가 났다.
‘6년의 차이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필리핀을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서로를 ‘운명’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서로에게 자신의 나라 음식을 소개하는 ‘쿠킹 데모’ 프로그램은 PUP 활동의 백미였다. 우리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날이 한국에서는 설날 연휴라는 점에 착안, ‘떡국을 통해 한국 명절 문화를 소개하자’는 야무진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상온에서 쉽게 상하는 떡을 필리핀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 현지 구매를 계획했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다.
순간 기지를 발휘해 생각해낸 것이 비빔밥, 해물파전 그리고 고구마 맛탕. 비빔밥에 들어갈 지단을 부치다 팔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한국의 맛이라고 소개하기엔 왠지 미심쩍은 맛탕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필리핀 학생들은 연신 ‘맛있다’를 외쳤고, 필리핀 학생들이 준비한 아도보(필리핀 전통 스튜), 할로할로(필리핀식 팥빙수)도 우리의 입을 즐겁게 했다. 다시 보고픈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PUP 학생들과의 짧았던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초등학교 교육 봉사를 위해 팜팡가로 떠났다. 우리가 머물렀던 가나안 농군학교는 ‘훈련으로 삶을 변화시키자’를 모토로 필리핀의 빈곤에 동참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된 곳이었다. 한국 회사가 연수차 방문하기도 하고 농군학교 인근 주민들이 며칠간 훈련 과정을 밟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을 가장 잘 체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식탁 구호. “Do not eat to eat, but eat to work.(먹기 위해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해 먹어라)” 가나안에서 처음 식탁 구호를 외치던 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한국에서 맛집 탐방이랍시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는 것을 취미 삼던 내가 ‘eat to eat 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과 음식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식탁 구호를 한국에 돌아와서도 매일 되뇌며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밥값하자!’는 내용인데 왜 이리 마음속 깊이 와 닿았는지….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머물렀던 시간 동안 봉사활동은 ‘뉴 산호세 초등학교’에서 이뤄졌다. 봉사활동 첫날 청천벽력 같은 미션이 내려졌다. 3~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간 우리를 예비 초등학교 학생들이 ‘Welcome Koreans’라는 팻말을 들고 맞이하고 있었던 것. 우리를 안내하던 교장 선생님은 “한국 자원봉사자들이 자기들을 맡아주길 바란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렇게 맑고 순수한 꼬마들에게 이끌려 우리는 예비 초등학생을 맡게 됐고, 결국 숙소로 돌아와 앞으로 남은 5일간의 일정을 새로 짜야 했다. 영어는 물론 타갈로그어에도 익숙하지 않은 꼬마들이었기에 대부분의 교육을 미술과 율동, 동요 배우기 중심으로 바꿔야 했다.
한국에서 며칠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준비했던 프로그램을 하루 만에 재조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우리를 반긴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떠올리며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너를 위한 일인데, 내가 더 행복했어”
초등학교에 머무는 시간 동안 오전에는 교육 봉사, 오후에는 벽화를 그렸다. 필리핀에서는 페인트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많은 건물이 흉흉한 잿빛을 띠고 있다. 난생처음 손에 쥐어보는 페인트 붓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잿빛 벽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알록달록한 캐릭터들을 그려 넣었다.
맡은 부분의 그림에 홀로 색을 입히다가 괜스레 외로워질 때면 어느새 아이들이 하나둘 내 옆에 쪼그려 앉아 “Maganda! Maganda!”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Maganda는 타갈로그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가끔 편지를 건네는 아이도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에는 ‘I hope we see you again but our teacher says no.(언니 또 만나고 싶은데, 우리 선생님이 안 된대요)’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아프고 뭉클했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어”라는 조금은 무책임한 말과 아쉬움의 포옹뿐이었다.
필리핀에서 약 3주간 생활하면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은 바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만난 것이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마음을 나누던 아이들의 순수하고 소박한 눈망울이 그립다. 돌이켜보면 자원봉사자로 이곳에 머물렀지만, 어느 기업의 광고 카피처럼 ‘너를 위한 일인데, 내가 더 행복했기에’ 베풀었던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높고 국민의 40%가 빈곤층이라는 필리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작고 초라한 집에서부터 거대한 고층 빌딩까지 서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 나라다.
내가 단지 문화 교류·봉사활동을 위해서만 그곳에 갔다면 필리핀을 제대로 이해하고 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농군학교에서의 기억이, 내가 만난 아이들이 계속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누군가 음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필리핀에 있을 우리 꼬마들이 떠오른다. 볼펜 한 자루, 예쁜 학종이 한 장에도 너무 고마워하던 아이들이 눈에 밟혀 ‘과연 나는 한국의 이렇게 좋은 환경에 적합한 사람일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들은 작은 것에도 쩔쩔매며 살아야 하고 나는 매일같이 낭비하며 풍요 속에 살아가는 것인지…. 필리핀은 내 안의 모자람을, 내 안의 이기심을, 내 안의 교만함을 정화시켜준 곳이다.
필리핀… 남은 이야기
인구의 10% 정도가 해외에서 취업하는 필리핀. 이곳 사람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국가는 타이완이다. 1박 2일간 홈스테이했던 가정에도 해외취업을 희망하는 학생이 있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는데 “필리핀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타이완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슬리퍼 따위를 만드는 일”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필리핀은 약 330년간 스페인 지배와 30여 년간 미국 통치 하에서 개방적인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필리핀 사람들이 유독 파티를 많이 즐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보수적이다. 실제로 여름 나라인 필리핀에서 3주간 지내면서 짧은 핫팬츠 등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필리핀이 어학연수지로 부상하면서 국민 대다수가 영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필리핀 고유 언어인 타갈로그어를 사용하고, 특별히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직업 이외에는 보통 생활영어 정도만 구사할 수 있다. 아예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필리핀에서 살아 있는 영어회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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