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표시도 없는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 기대감을 안고 살며시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함께 낯설지 않은 인도 향이 물씬 느껴졌다. 아프리카 공예품들과 작은 숲,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서는 레게머리의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튜디오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사진작가 김중만 씨와의 첫 대면은 그랬다. 뭐랄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랄까. 사진계의 거장, 내로라하는 수많은 스타와 작업, 한국 패션사진의 문을 연 주인공, 그래서 그만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하고 화려한 예술가.

“외형적으로 화려해 보이나요? 하지만 나는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 참여하는 게 1년에 5번 미만인 사람입니다. 극도로 자제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사진만 미친 듯이 찍습니다. 나한테는 그게 ‘순결’이니까요.”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중학생 김중만의 꿈은 탐험소설가였다. 1960년대, 모든 학생이 대통령과 군인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준 ‘로빈슨 크루소’를 밤새 읽은 후에는 ‘소설가는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청계천의 헌책방을 순례하며 소설이란 소설은 몽땅 섭렵했다. 그러던 무렵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라는 신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너무 좋았어요. 공부하기 싫은데 외국을 간다잖아요. 그 시절에는 해외 가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게다가 탐험소설가에게 최고의 무대인 아프리카라니, 만세를 불렀죠.”

부모님을 따라 도착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끝자락에 위치한 ‘부키나파소’는 그가 상상했던 밀림 속 정글이 아니었다. 허허벌판,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었다.

“그때 탐험소설가 꿈을 접었어요. 꿈이 확 깨지더라고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밀림뿐 아니라 전기도 안 들어오지, 학교도 없지. 그러다 보니 아버지께서 프랑스로 건너가서 학교를 다니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혈혈단신 프랑스로 건너갔어요. 이때부터 김중만의 전성기가 시작된 거죠. 하하하.”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행복한 만큼 가난했던 청년 김중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프랑스에서 그는 어떻게 ‘전성기’를 맞이했을까.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건 70년대만 해도 흔치 않았죠. 프랑스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중·고등학교 학생 다 합쳐서 1500명 정도였고 외국인은 나 혼자였어요.”

아무리 시골이어도 그렇지 전교생 중 외국인이 단 한 명이라니, 혹시 왕따를 겪진 않았을까.

“인기 많았어요. 이방인이 겪어야 하는 배타적인 따돌림 같은 건 겪지 않았어요. 시골 아이들이라 더 호기심을 보였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낸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파견 의사였던 아버지는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가난한 생활이 이어졌다. 학비를 벌기 위해 주말과 방학에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릇 닦기를 비롯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있었지만 자유로운 나라에서 문화적 쇼크를 받아가며 살았던 재미있는 생활이었다고 회상했다.

“돌이켜 보면 무한한 꿈과 도전 정신 그리고 그만큼의 가난을 함께 가지고 살았던 시절이에요. 하지만 가난이 장애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었죠. 내키는 대로 즐겁게 잘 살았어요. 그때만큼 자유롭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그는 신나는 고교 시절을 보내며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된다. 그리고 미술대학에 지원한다. 이유는 단지 수학 공부하는 게 너무 싫어서였다고.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인생의 터닝 포인트 - 사진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어느 날, 암실 작업을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으로 처음 사진을 접하게 됐다.

“5분 만에 사진이 인화돼서 나오더라고요. 5분 만에 사진을 배운 거죠. 그림은 한 작품 완성하려면 한 달 정도 걸리거든요. 5분 만에 인화돼 나오는 사진을 보는데 ‘이거구나’ 싶었어요.”

사진에 매료된 그는 교수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버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이 마냥 좋았으니까. 사진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젊은 작가상’과 함께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며 화려한 사진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모든 사진가의 꿈은 패션사진가가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내가 그들을 제치고 세계적인 사진가 밑으로 들어가게 된 거죠. 그때 딱 한 번 ‘내가 세상의 왕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이처럼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낯선 곳으로 갔지만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평범한 미술학도가 사진에 매료되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도 겪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난 것도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척박한 아프리카 땅.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행복해하시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20대에는 도시적인 사고와 문명적인 환경이 있어야만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죠.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시던 부모님이 늘 웃으셨던 기억이 나요. 40대가 지나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1990년 아프리카 대륙을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아프리카를 알리는 것, 또 한 번의 도전이고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온라인에서 그의 아프리카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photo.naver.com/galleryn/spec- ial/africa)

‘진정한 사진가’의 길을 결심하다

애당초 목표의식 같은 건 없었다. 하루하루 사진을 찍으며 사는 게 너무 좋았고 그것이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물론 난관도 많았지만 그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들은 이겨내지 못했을 정도의 큰 역경이 많았어요. 하지만 워낙 낙천적이고 느린 편이라 어려움이 와도 ‘헤쳐나가야지’ 하고 말아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타입이에요.”

인터뷰 직전에도 독도 사진을 찍고 왔다는 그는 요즘 한국적인 것, 한국의 이미지를 주로 찍는다고 했다. 상업사진에서 손을 뗐다는 그는 “주로 돈이 안 되는 사진을 찍고 있”며 웃었다. 개런티가 가장 높은 사진작가였던 그가 더 이상 상업사진을 찍지 않는다니 놀랄 ‘노’자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이 때문이죠. 사진은 예술이 아니에요. 단지 조금 비싼 장비를 들고 조금 비싼 일당을 받는 노동자인 거예요. 이제는 버릴 때가 됐고 진짜 사진가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 3년 전인 2007년 11월 그는 상업사진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목에 커다란 문신을 새겨 넣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문신을 한 건 처음이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오히려 3년만 더 일찍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와본 사람들은 스튜디오가 소박하다고 말하는데 좋은 카메라, 큰 스튜디오 등을 떠나서 좋은 콘텐츠를 담는 게 우선이고 절대적이에요. 그걸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있어요. 나한테는 그게 정말 힘든 과정이었지만. 수입이 1/20로 줄었다면 믿겠어요? 덕분에 시계 마니아인데 시계도 못 사고 마이너스 통장 쓰고 있어요.(웃음)”

바닥, 다시없을 소중한 경험

그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도전이 없다면 내일도 없다고. 바닥을 쳤다고 좌절하지 말고 바닥을 칠 거면 확실하게 치라고.

“그 바닥은 두 번 다시 없을 소중한 경험이고 시간이에요. 그런 경험을 갖지 않고서는 어느 날 원하는 목표에 도달했을 때 계속 나아갈 수 없어요. 직접 겪어봐서 알아요. 한 번은 반짝일 수 있지만 절망의 시간 없이는 절대로 이어갈 수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또한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나 원대한 포부를 갖고 사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대다수가 사회 높은 위치에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조금 낮아도 괜찮아요. 실천 가능해서 이룰 수 있는 꿈이 더 낫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이룰 때 조금씩 높아질 수 있어요. 처음부터 높게 잡고 좌절하고 실망하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닐까요.”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중만, 도전은 꿈을 잇는 다리… 도전 없이 내일도 없어
김중만

195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71년 정부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부아프리카 부키나파소 이주
1974~77년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 수료
1977년 프랑스 ‘오늘의 사진가 80인’ 선정

수상
2000년 올해의 패션 포토그래퍼상
2010년 제5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

저서
‘아프리카 아프리카’ 외 20권


글 한상미 기자 hsm@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