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인근에 자리 잡은 ‘스페이스맘’이라는 5층짜리 건물은 크지는 않지만 개성 있는 아름다움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1층은 작은 공연장 겸 강당으로 무대엔 그랜드 피아노와 드럼이 놓여 있다. 입구 바로 옆에는 도심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대나무가 심어져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이곳엔 한국폼텍(www.formtec.co.kr)의 디자인 및 연구·개발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폼텍은 국내 프린터용 라벨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업체다. 얼마 전엔 고급 시스템 다이어리 시장에도 진출했다. 프린터용 라벨은 각종 프린터에 다양한 라벨 용지를 넣어 라벨 위에 원하는 내용을 신속하게 인쇄할 수 있는 제품이다.

예컨대 책을 고객에게 발송할 때 주소를 일일이 손으로 쓰지 않고 프린터용 라벨을 이용하면 컴퓨터에 수록된 주소가 자동으로 라벨에 인쇄된다. 그런 뒤 접착식으로 돼 있는 라벨을 떼어내 우편봉투 위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폼텍 IT전략운영팀에서 근무하는 김기태(28) 씨는 이러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주 업무인 ‘초보 프로그래머’다. 지난해 7월 입사해 이제 막 입사 1년을 넘긴 김 씨에게 한국폼텍은 대학(서일전문대 인터넷정보과) 시절부터 키워온 꿈을 실현해나가는 ‘현장’이자 ‘실습터’다.

김 씨가 회사를 선택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두 가지. ‘과연 그 회사가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가’와 ‘나를 채용한 후에 얼마나 믿고 써줄 것인가’였다.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을 때 회사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는 그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부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라는 일이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거든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이지만 회사의 지원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프로그래머라는 꿈을 키워나가는 데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정 분야에서 특화된 일을 하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에서는 자신이 의지만 있으면 다양한 분야의 일을 배우며 자신만의 업무 노하우를 키워갈 수 있으니까요.”

김 씨는 20대 젊은이답게 ‘도전’을 즐긴다. 익숙하고 남들이 많이 갔던 길을 가기보다는 약간 생소하고 덜 알려진 길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그길로 향한다. 이 같은 ‘도전 정신’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대다수 프로그래머가 사용하고 있는 ‘자바’를 쓰지 않는다. 대신 이름도 생소한 ‘델파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한다.

“자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 시장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델파이’를 쓰는 게 쉽지는 않죠.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날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눈이 뜨이더군요.

지금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자바 대신 델파이를 쓰는 프로그래머들은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우린 남들과 다르다’는 프라이드를 갖고 있습니다.”

김 씨가 프로그래머로 진로를 정한 건 대학 시절 한 교수의 질문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날인가 전공과목 담당 교수님이 연구실로 부르시더니 ‘넌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때까지 꿈이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교수님 방을 나와서도 꽤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전공을 살리면서도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프로그래머가 가장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아직 프로그래머로서 ‘고수’는 아니지만 그는 스스로 만든 프로그램이 PC에서 실행되고 또 많은 사람이 애용해줄 때 느끼는 희열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트럭 운전을 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현장관리 프로그램을 제 손으로 만들어 드린 일이 있어요. 개발에만 무려 넉 달이 걸렸죠. 처음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던 아버지도 나중엔 당신 아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걸 아시곤 대견했던지 ‘허허’ 웃으셨는데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로까지 거론되는 요즘의 사회풍경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흔히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가장 중요한 게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 주위에도 소위 알아주는 대학을 나와 아직 ‘백수’로 지내고 있는 형이 있는데 이 형 생각은 ‘내 스펙이 이 정도는 되니까 회사도 여기에 맞춰 가야 하는 것 아니냐’ 이거예요. 잘못됐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자신만의 진정한 실력을 쌓는 게 급선무 아닐까요?”

그는 취업 일선에 나선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전’은 젊은이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몸으로 부딪쳐보는 겁니다. 대학교 때 호주로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당시 제 수중엔 항공료 제외하곤 100만 원밖에 없었어요.

영어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요. 어떻게 보면 무모한 시도였는데 상황이 닥치니까 어떻게든 길이 생기더라고요. 미리 두려워하지 않고 또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폼텍은 어떤 회사?

한국폼텍은 프린터용 라벨 출력 용지(통칭 ‘라벨 용지’)를 미국과 홍콩,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세계 15개국에 수출하는 강소기업이다. 지난해 수출액은 300만 달러에 달한다. 금액이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에 이런 산업조차 없었고 내수시장마저 외국 기업이 장악했던 것을 떠올리면 혁혁한 성과다.

라벨은 제품의 이름과 내용을 기록하는 종이다. 하지만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섭씨 수백 도에서도 녹아 없어지지 않고 영하 30도의 저온에서도 얼어붙어 깨지지 않아야 한다.

단단하게 잘 붙어 있어야 하고 떼어낼 때 점착 성분이 본 제품에 남지 않아야 한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물성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폼텍이 수출에서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 덕분이다. 이 회사는 독자 기술로 라벨 용지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뒤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 5개 국어로 번역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폼텍은 뛰어난 제품력과 강력한 소프트웨어로 1996년 이 분야에 진출한 지 4년 만에 국내시장 1위로 올라섰다. 지금은 국내 라벨 용지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70%대를 차지하고 있다. 폼텍의 기세에 눌려 이 시장을 장악했던 외국 기업이 국내 지사를 철수했을 정도다.

폼텍은 기술력만으로 승부를 거는 게 아니다. 라벨 용지는 레이저, 잉크젯 등 프린터 종류별로 특화된 종이를 사용해 가장 적합한 상태로 인쇄할 수 있도록 세분화돼 있다. 이렇게 종류별·규격별로 나뉜 라벨만 250여 종에 이른다.

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