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두 번 도전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얘기를 듣고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경험만큼 좋은 것은 없다지만, 시간·재정적으로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큰 꿈을 품고 도전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여장부다운 당찬 면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뉴질랜드 지도와 약간의 돈만 가지고 비행기를 탄 결과는 참담했다. 난 2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정적으로 영어에 대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영어라고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 하지만 외국에선 영어를 못하는 이방인을 가엾게 봐줄지는 몰라도, 노동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억울한 마음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재도전을 다짐했고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스’를 통해 비자 신청을 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현지 어학원을 알아봤다. 1개월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로 브리즈번에 들어갔다. 브리즈번은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그곳에 검증된 어학원이 많다는 추천을 참고했다. 브리즈번에서의 연수 3개월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수업시간마다 가장 먼저 대답하려고 노력했고 또 많이 물어보려고 노력했다.

어학원 코스를 마친 뒤에는 ‘골드코스트’라는 도시에 갔다. 잘 모르는 곳이지만 ‘42km 해변의 모래가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라는 도시 이름에 관한 설명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골드코스트로 향하는 길, 내 손에는 이력서 50장이 들려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체험기] “영어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어 실력 부족해 2개월 만에 귀국…재도전

50장의 이력서를 돌리고 4일이 지났을까. 로열우드(Royal Wood) 리조트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질문했고,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테스트했다.

드디어 첫 번째 아르바이트 시작. 내가 맡은 일은 구내식당에서 리조트 직원이 먹을 식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배식을 하면서 리조트 직원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다른 국가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됐다. 그중 네덜란드에서 온 케빈이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행동 하나하나가 영화 속의 짐캐리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설렘과 두려움의 시간을 넘나들었지만, 영어가 늘면서 그 횟수도 점차 줄었다. 2개월을 구내식당에서 보내고, 두 번째로 레스토랑 서빙을 시작했다. 레스토랑으로 보직이 변경되기 전에 오럴 테스트를 한 번 더 실시했다.

레스토랑 서빙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샐러드 하나에도 드레싱 종류만 10가지가 넘고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까지 주문을 받으려면 어설픈 영어로는 힘들었다. 또 외국인 발음이 다 달라서 메뉴를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쉬는 날에는 여지없이 골드코스트 해변으로 놀러 갔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5개월 모은 돈으로 호주 전 지역을 여행하는 중이다.

멜버른, 시드니, 애들레이드, 퍼스 등 다양한 도시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며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문화 체험을 하고 있다. 앨리스스프링스를 갔을 때 파리 떼에 둘러싸여 비명을 지른 적도 있다. 특히 멜버른에 갔을 때 헬기를 타고 내려다본 그레이트 오션 도로(Great Ocean Road)라는 해안선을 잊을 수 없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경험자로서 조언을 하고 싶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한 가지는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영어가 되지 않으면, 그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만, 외국에선 이게 통하지 않는다. 떡을 달라고 똑똑히 얘기해야 한다. 운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챙겨주지 않는다. 최소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길 바란다. 서울대, 베이징대, 도쿄대 졸업장이 있다한들 현지인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외국에서 일을 하기 위한 최고 스펙은 바로 영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