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은 지금] 35년째 ‘고시의 메카’…사시에서 행시로 ‘바통 터치’
고시촌 하면 떠오르는 곳, 서울 신림동이다. ‘신림동에 산다’고 하면, 그건 곧 ‘나는 고시생’이라는 뜻. 최근 사법시험과 외무고시 제도가 바뀌긴 했지만 신림동은 여전히 ‘고시의 메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곳엔 입신양명을 꿈꾸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인구밀도가 더욱 높아진 신림동을 찾았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은 수십 년 동안 ‘고시촌’의 대명사였다. 그 시작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가 대학로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신림동 일대에 하숙촌이 형성됐다.

1980년대 들어 전국의 고시생들이 모여들고 어느 틈에 신림동은 곧 고시촌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신림9동의 일명 ‘녹두거리’가 최대 고시촌으로 만들어졌고, 신림2동과 봉천동 일부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2010년 신림동 고시촌은 노량진과 강남에 왕좌를 내어주고 약간은 쇠락한 느낌이다. 가장 큰 원인은 사법시험의 폐지다. 2016년을 끝으로 사법시험이 없어지면서 고시생들은 법학전문대학원, 즉 로스쿨 대비를 위해 강남 학원가로 대거 이동했다.

신림동 고시촌의 새로운 주인은 행정고시 준비생들이다. 2012년이면 외무고시도 폐지될 예정이라 신림동은 행정고시 준비생들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할 것이다.

지금도 신림동 고시촌에는 행정고시 준비생과 함께 사법시험의 끝자락을 노리는 고시생과 로스쿨 준비생, 그리고 외무고시·법무사·노무사 등 각종 시험 준비생이 생활하고 있다. 신림동은 여전히 고시촌의 대명사로 남아 고시생들의 애환을 함께 겪어나가고 있는 동네다.

원룸과 독서실을 오가는 생활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서는 1단계는 생활을 할 원룸과 공부를 할 독서실을 정하는 일이다. 원룸에서 공부를 해도 되지만, 많은 고시생이 거주와 공부를 분리하고 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고 모(27·여) 씨는 “자기 집에서 먹고 자도 되겠지만 학원과 독서실이 가까우면 시간 절약이 되고 편하다”면서 “경쟁자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것이 확실히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해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말했다.

꼭 원룸주택이 아니더라도 신림동의 고시원들은 대부분 원룸형이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를 들여놓고도 공간이 꽤 남는다. 전세 4000만 원 정도를 기준으로 보증금과 월세가 조정된다. 보증금 500만 원이면 월세는 35만 원인 식이다.

이보다 싸거나 비싼 곳도 있지만, 이 정도면 쾌적함이 보장되는 수준이다. 식대나 관리비에 따라 비용이 조금 더 붙기도 한다. 돈 없으면 고시 준비도 못한다는 말이 틀린 말만은 아니다.

그래도 주거 공간은 이른바 ‘잠만 자는 방’으로 하면 월 20만 원대에 해결할 수 있다. 공부가 중요한 고시생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은 독서실이다. 월 10만 원 정도의 여러 설비를 갖춘 독서실이 널려 있는 곳이 신림동이다.

기본적인 책상도 일반 독서실보다 넓지만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컴퓨터실, 안마의자와 대형 TV가 있는 휴게실, 비데 화장실 등을 갖춘 독서실이 많다. 적어도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환경을 탓할 수 없다.
[신림동은 지금] 35년째 ‘고시의 메카’…사시에서 행시로 ‘바통 터치’
‘학원·스터디 잡기’에 사활 건다

고시생들은 전문학원의 인기 강의에 사활을 건다. 좋은 자리를 맡느라고 일찍부터 줄을 서고 대기표를 받기도 한다. 수강생이 많은 대형 강의실에서는 TV를 설치해놓아도 워낙 큰 규모라 강사 얼굴조차 자세히 보기 어려운 탓이다.

막판에는 자신이 정리해놓은 것을 점검하거나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듣는 수험생도 있지만, 멋모르는 초반에는 학원 강의로 감을 잡기 마련이다. 응시하는 고시가 무엇인지, 1차 시험인지 2차인지, 종합반인지 단과 수강인지에 따라 고시생들이 학원에 머무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신림동 고시학원은 베리타스, 한림법학원, 한국법학원, 합격의법학원, 춘추관 등이 유명하다. 선배 고시생들은 학원보다는 과목별 강사를 보고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학원 간에 유명 강사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하다.

사법, 행정, 외무, 로스쿨 전문학원인 베리타스 건물은 신림2동 고시촌의 이정표다. 한림법학원은 사시, 행시, 외시 외에도 자격증과 공무원 시험을 포괄한다. 1990년대부터 문을 연 곳이다.

대학교에서 이들 학원 강사를 초청해 각종 고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유명 강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학원별 공개 강의를 듣고 강사를 결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소규모 공부모임인 ‘스터디’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알음알음 인맥을 동원해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으거나 인터넷 카페, 학원과 독서실 게시판 등을 이용해 스터디를 구한다.

학원에서 스터디 모임을 조직해주는 경우도 있다. 신림동의 독서실 휴게실이나 커피숍에서는 스터디가 한창이다. 사람 만나느라 소비하는 에너지도 상당한 법이라 보통의 스터디는 주관식 논술시험인 2차 집중 대비를 위해 모이곤 한다.
[신림동은 지금] 35년째 ‘고시의 메카’…사시에서 행시로 ‘바통 터치’
‘월우수돈금계’를 아시나요?

신림동 고시촌은 학원과 독서실을 비롯한 모든 것이 고시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서점과 복사집이 대표적이다. 신림동의 헌책방에는 합격한 고시생, 혹은 고시를 포기한 수험생들이 내놓은 고시 관련 서적이 수북하다.

복사집에서는 모의고사 기출문제나 봐야 할 논문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일명 ‘어둠의 경로’다. 이 때문에 일단 신림동에 가면 어느 정도 고시 준비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식사도 해결하기가 수월하다. 뷔페식인 고시 식당들은 한 끼에 3000원이 안 되는 가격으로 식권을 일괄 판매한다. 그래서 신림동 고시생들은 두세 개 입맛에 맞는 식당을 정해놓고 100장 단위의 식권을 여러 명이 구입해서 나눠 가지기도 한다.

신림동 고시촌 식당가에는 ‘월우수돈금계’라는 월요일 소고기, 수요일 돼지고기, 금요일 닭고기가 나오는 식단이 언제부턴가 정석이 됐다고 한다. 일반 식당에서 한 끼만 사먹어도 가격 대비 양이 푸짐한 곳이 신림동이다. 식당 순회가 신림동 고시생이 누리는 작은 즐거움이 된다.

고시와 다소 어울리지는 않지만 유흥가도 고시촌의 한 부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시촌의 오락거리라고는 당구장, PC방, 비디오방 정도였다. 신림동 고시촌은 PC방이나 비디오방 이용료도 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불법 퇴폐 업소가 많아져 두통거리가 되고 있다. 남성 전용 스포츠 마사지, 토킹바 혹은 섹시바 등이다. 달리 고민을 털어놓을 길 없는 고시생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스크린 경마 같은 도박에 발을 들이는 고시생들도 종종 있다. 자기 관리가 가장 핵심인 수험 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신림동이라고 다 같은 신림동이 아니다?

[신림동은 지금] 35년째 ‘고시의 메카’…사시에서 행시로 ‘바통 터치’
신림9동 번화가
고시 초년생들의 보금자리

학원과 독서실이 모여 있는 신림9동 번화가는 고시 초년생들이 많이 찾는 거주지다. 잠자는 곳이 이 근처에 있으면 확실히 학원이나 독서실에 가는 시간이 절약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더 비싸기도 하다. 유동 인구가 많아 시끄러운 것이 단점이다.

신림9동 산 근처 가격 대비 시설 좋은 원룸 많아
신림9동 고시촌은 산 밑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산 쪽으로 갈수록 번화가와 같은 가격에 시설이 더 좋은 원룸이나 고시원을 찾기 쉽다. 너무 외진 곳은 밤에 걸어다니기 위험하므로 특히 여성 수험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신림2동 중견 고시생 밀집지

학원이나 독서실, 자주 가는 고시 식당 등은 대개 신림9동에 모여 있다. 신림2동은 낮에는 확실히 공부하고 밤에는 조금이나마 복잡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중견’ 고시생들이 찾는다. 신림2동에 살며 운동 삼아 학원과 독서실, 원룸이나 고시원 사이를 걸어다닌다는 고시생들을 볼 수 있다.

신림동에서 집 고르기 -방음·냉난방부터 체크해야

신림동에서는 급한 마음에 거주지와 독서실을 서둘러 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워낙 숫자도 많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시설도 평준화돼 있다. 하루 이틀 정해두고 몇 군데를 돌아보면 가격 대비 조건이 한눈에 파악된다. 자신에게 필수불가결한 조건 몇 가지를 정해놓고 나머지를 포기하면 싼 가격의 원룸이나 고시원이 눈에 들어온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방음이다. 밤낮으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어떤지, 층이나 방 사이 소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야 나중에 공부할 때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다음으로는 냉난방이나 온수가 잘 나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직접 살아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기에 고시촌 인터넷 카페 등에 가입해 먼저 살아본 사람들의 경험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