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기자, 소설가, 언론학자, 연구원 원장 그리고 교수까지 다양한 호칭으로 기억되는 그이지만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 이 두 가지 화두를 숙명처럼 끌어안은 채 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직도 ‘01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쓰고, 운전면허증 없이 평생을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큼 우직한 사람이지만, 젊은이들과의 소통엔 환호작약하는 청춘. 세밑이 가까워짐을 온몸으로 가늠할 만한 추위였지만, 옹골찬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한 손석춘 교수다.
[靑春에게 告함]“인생은 아프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
손석춘
1960년생
성균관대 언론학 박사
1984년 <한국경제신문> 기자
1987년 <동아일보> 기자
1991년 <한겨레 신문> 기자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 공동대표
2005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창립
2011년 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Q강의, 연구, 저술 등 여전히 바쁜 것 같다.
아무래도 학교에 몸담고 있다 보니 논문과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학술지에도 글을 싣지만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학술지는 필자와 심사위원 단 두 명만 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나. 커뮤니케이션학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대안들을 생각하며 글을 읽고, 쓰고, 또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즐겁게 반복하고 있다. 수업이 없는 날엔 여수, 울산, 전주 등 지방에 강연을 하러 다니기도 한다.


Q‘교수 손석춘’은 낯설기도 한데, 교수로서의 삶은 어떤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한 학생이 내게 “영 이상합니다”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학부 시절 나로 인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는데, 뭔가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교수라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색하다는 말이었다. 그 학생의 말처럼 교수로 지내는 지금, 몸은 편하다. 하지만 마음은 가장 불편하다. 언론사에 있을 땐 사회의 부조리함을 직시하고 비판하며 조금씩이라도 바꾸어 나가는 게 보람 있었는데…. 특히 졸업생들이 거친 한국 사회와 기업으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나만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靑春에게 告함]“인생은 아프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
Q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치나
‘21세기는 창조적 자본주의의 시대’라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창조’가 중요한 것 아닌가. 그래서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서 창조와 비판의식을 같이 강조하는 편이다. 창조는 비판이 있고 나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비판적인 측면만 강조하면 혹시라도 기업들이 오해할까 봐 창조도 더불어 강조하곤 한다. 비판적 사고를 힘주어 말하면 사람들은 으레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은 미국에서도 비판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줄곧 가르치는 것이다. 비판의식은 복잡한 그 무언가가 아니라, 대안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늘 첫 강의 때 이를 명토 박기도 한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능력은 토론으로 길러질 수 있는데, 옳고 그름을 넘어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1학년들에게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괴테의 <파우스트>를 추천하고, 2학년 때부터는 비판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다양한 책들을 권해준다.


Q 글에 ‘순 우리말’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
글로써 밥벌이를 해왔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유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국어인데, 지식인으로서 늘 우리 말에 빚지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죽어가거나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사용하면, 지금보다 더 윤택한 우리말이 되는 데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은 거리를 지나가다 어느 가게 이름이 ‘곰비임비’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봤다. 내가 종종 쓰는 단어여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말이 더 자주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었다.


[靑春에게 告함]“인생은 아프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
Q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흔한 말이지만 ‘삼다(多讀·多作·多商量)’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일기다. 일기를 쓰면 꾸준히 생각하게 되고, 성찰하게 된다. 쓸 게 정 없으면 감동받은 책의 구절을 일기에 써도 좋다. 서로 다른 성향의 신문을 비교해가면서 읽고, 칼럼을 필사해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Q 대학에서 느끼는 요즘 청년들,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어디에 마땅히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창조적 사고가 번뜩여 놀랄 때가 많다. 한국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대학가에 경직된 이념이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 현실은 변하는데 이른바 ‘운동권’들은 비판적, 창조적 사고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이 점점 현실과 괴리되고, 현실에 관심을 많이 두지 않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상황까지 초래된 게 아닐까. 어느 교수가 “요즘 젊은이들에겐 희망도 없고, 책도 안 읽는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난 그 교수에게 “학생에게 얼마나 다가가 보셨나요?”라고 되물었다. 나를 포함해 기성세대가 청년들 속으로 진정성 있게 다가섰는지 자성할 대목이다.


[靑春에게 告함]“인생은 아프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
Q 기업들의 인문계 출신 홀대, 대학의 문·사·철 폐지, 고교 문과 축소 등 ‘인문계 수난’ 시대다. 이런 악순환, 어떻게 해야 할까?

졸업논문을 쓸 때 한 여학생이 고충을 토로했다. 원서 60곳을 넣었는데 단 한 곳에서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거다. 교수로서, 또 인생 선배로서 마음이 무척 안 좋았다. ‘인문 정신’이 필요하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학생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이 새로운 차원의 도약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 경제에 이바지한 기업들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고 싶진 않다. 다만 기업들이 제대로 도약할 수 있도록 ‘경제 저널리즘’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비판적이면서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기업 최고경영자들도 이런 차원에서 기업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적대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Q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등으로 불리는 요즘 청년들에게 돌파구는 없을까?
사회 속에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사람은 사회·역사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생일 땐 군부 독재와 맞서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시대적인 소명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 세대는 군부 독재를 간신히 넘어서서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청년들도 기성세대의 못남에 대해서만 탓할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개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물려줘야 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 함께하겠다.


[靑春에게 告함]“인생은 아프지만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
Q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은 어떤 것일까?

정의롭지 못한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많은 청년들이 시위를 했고 경찰서에 잡혀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전처럼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압살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서로 다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21세기 창조적 자본주의에 맞는, 또 우리 기업들이 원하는 창조적 인재가 되기 위해서 서로 모여 논의를 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면 그것 자체가 스펙이 될 수 있고, 그런 과정이 모여 결국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이 되지 않을까 싶다.


Q 새해를 맞이해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통을 받을 때 아파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인생을 잘 풀어가는 것”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잘 풀리지 않으니까 인생은 살아볼 만 한 거다. 아프긴 하지만, 인생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의지와 결기를 세워갔으면 한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제약도 있겠지만, 문제의식만은 잃지 말길 바란다. 갈수록 살기 팍팍하지만 목표를 명확히 정하고 꾸준히 정진해 나가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


Q 어떤 사람으로 이 사회에 기억되고 싶은가
이메일 아이디가 ‘새 길’이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해 만들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드는 생각은 ‘인간은 사랑하는 만큼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데 매일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한참 부족하지만,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글 박상훈 기자 |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