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염색한 미군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계가 있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 소설가 박완서

그랬다. 전쟁통에 끼니 때우기 급급했던, 그래서 삶 자체가 전쟁과 다름없던 엄혹한 시절에도 선구자는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그녀의 삶에선 그제나 지금이나 ‘최초’, ‘최고’라는 단어를 떼놓을 수 없다.
패션디자이너 노라 노 NoraNoh

1928년생
1947년 미국 유학
1952년 ‘노라노의 집’ 오픈
1956년 한국 최초 패션쇼 개최
1963년 한국 최초 기성복 패션쇼 개최
1967년 윤복희 미니스커트, 펄시시스터즈 판탈롱 스타일링
1978년 뉴욕 7번가 쇼룸 오픈
1979년 메이시스 백화점 입점
1984년 미국 <보그> 소개
1986년 미국 <바자> 소개
1995년 미국 사업 철수
2010년 제3회 코리아패션대상 대통령 표창
2011년 제1회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 수상(패션디자이너 부문)
2012년 데뷔 60주년 라비앙로즈전
2013년 다큐멘터리영화 ‘노라노’ 개봉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부모님 모두 일본에서 유학한 엘리트셨죠.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방송국 창립 멤버였고, 어머니는 초대 아나운서였어요. 외할아버지는 조선 왕실의 영어교사였고, 한일합방 때는 인천세관장을 지내신, 조선 말기의 개화파셨죠. 100년 전 찍은 할아버지 사진을 보면, 그 시절 이미 사파리에 모자를 쓰셨어요. 어머니도 프랑스 양장을 즐겨 입는 멋쟁이셨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감각이 대를 이어온 게 아닌가 싶어요.”

기워 입은 치마저고리가 고작이었던 시절, 어머니는 딸아이에게 세라복을 챙겨 주셨다. 노라노, 한국 이름 노명자의 삶은 꿈 많던 여고시절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 자체였다. 그렇게 명망가의 딸로 살던 명자가 ‘노라’의 삶을 살게 된 데는 시대의 아픔이 배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군수공장이나 정신대로 끌려가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명문학교(경기여고)에 다니고 집안도 부유한 경우엔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의무적으로 끌려갔죠. 강제 징집을 피하는 길은 결혼밖에 없었어요.”

17살, 이제 막 피어난 꽃잎과도 같은 시절. 수다와 웃음 대신 선택한 건 일본군 대위와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사흘 전에야 처음 얼굴을 본 남편은 일본으로 함께 건너간 지 일주일 만에 전장으로 떠났다. 시부모님에 시동생들 치다꺼리까지 도맡았던 고된 시집살이였지만, 그것이 여인네의 숙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있던 오키나와 전선에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이뤄졌고, 그때 비로소 운명의 갈림길은 시작됐다.

“괴멸되다시피 했으니 남편도 당연히 전사했으려니 했어요. 그러자 시부모님이 이혼을 요구하더군요. 보상 때문이었어요. 육군 소령이었으니 금액도 상당했겠죠. 그때 이미 마음속엔 결심이 섰어요. 이건 아니다.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죽었다고 믿었던 남편이 해방 직후 돌아왔지만 이혼을 결심했어요. 일본서 반 년 정도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있던 차에 해방을 맞았죠.”
일제 정신대 피하기 위해 올린 결혼식
이혼의 대가는 컸다. 1945년의 ‘이혼녀’에게 세상은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섬이었다. 아버지의 승낙을 받긴 했지만, 어머니나 할머니 등 다른 집안 어른들의 노여움은 대단했다. 쫓겨나다시피 식모 방에서 먹고 자야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내가 안 살겠다”고 했으니 보통 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독립해야 했어요. 돈을 벌어야 했죠. 그때만 해도 여자가 직업을 갖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어요. 마침 미 군정청에서 영어와 타이핑을 할 줄 아는 여직원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동생이 미군부대에서 빌려온 타자기를 종이에 그대로 그리고, 영어회화 책을 사서 석 달간 공부한 후 시험을 봤어요. 운이 좋았는지 합격했죠.”
미군들이 대신해서 우리나라를 다스렸던 시절, 안국동에 있던 영국식 저택에선 주말마다 장관급 고위 미군 관료들의 파티가 열렸다. 파티 준비와 통역으로 파견을 나가기 시작했고, 그녀를 눈여겨본 고위 장교가 정식으로 파티에 초대했다. 돈이 부족하니 파티복은 직접 해결했다. 워낙 옷을 좋아해 12살 때부터 직접 옷을 해 입던 소질이 발휘된 것이다.

“고위급 미군의 부인이 한국계 3세였어요. 할리우드에서 살다온 멋쟁이였죠. 하루는 ‘어디서 옷을 사 입느냐’고 묻더군요. ‘직접 해 입는다’ 했더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파티 참석자들을 다 불러서 ‘소질이 있지 않느냐’며 ‘공부를 시켜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이야기를 듣던 분들이 하나 같이 하는 얘기가 ‘Why not?’이었어요.”

한국, 그전엔 조선이라 불렸던 아시아의 보잘것없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에서 이혼녀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했던 노명자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집을 뛰쳐나온 주인공 노라는 이제 현실 속 인물 노라가 되어 세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노명자가 아닌 노라노
“두려움 같은 건 애당초 없었어요.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만 들었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달러가 없고 송금 시스템도 없으니, 아무리 돈 많은 집안이라도 미국 유학은 힘든 시절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분들이에요.”
‘아름다운 나라’ 美國이라지만, 1947년 전쟁 직후의 고단한 삶은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려워 야채가게 같은 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도 수두룩했다. 백인 청년도 그러한데, 동양에서 온 작은 여학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립학교인 ‘프랭크 웨건 테크니컬 칼리지(Frank Waggon Technical College)’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가난한 유학생 신분은 변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야만 했던 형편. 운 좋게도 당시 유명한 패션업체 디자인실에서 견습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었다. 동양인 여성이 패션을 전공하고, 비록 말단이긴 했지만 패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 사회에선 큰 뉴스였다.

“흑인이 최초로 디자이너로 입사한 회사도 그곳이었어요. 한 회사에 백인, 흑인, 황인이 모두 일하고 있으니 화제가 될 만했죠. 지역의 신문사란 신문사에선 모두 취재를 나올 정도였어요.”

2년의 학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안 올 수가 없었다’는 게 귀국의 이유.
“일종의 복수심 같은 거였죠.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과 사회에서 온갖 멸시와 지탄을 받았거든요. 억울하게 당했다는 분노, 솔직히 말하면 그런 분노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온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혼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겠다고 마음먹었죠. ‘한국에 곧 전쟁 난다’는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돌아왔어요.”


한국 패션의 시작을 알리다
노라노가 되어 돌아온 모국에 그녀를 반겨준 건 화려한 플래시 세례도,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꽃다발도 아닌 ‘전쟁’이었다. 조여 오는 인민군의 기세에 남아 있는 건 부산뿐인 상황. ‘괴뢰군이 마산까지 점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삶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던 부산은 어느 도시 못지않게 활기찼다. 마지막 희망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듯 피난민들은 천막 안의 쇼에 열광했다. 귀국 직후 우연히 연극과 무용 의상을 디자인해 주며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이번에는 쇼 의상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군요. 쇼 의상은 화려해야 하잖아요. 그때 스판덱스나 비즈가 어디 있겠어요. 미군이 먹고 버린 맥주 깡통을 오리고, 담뱃값 속 은박지로 비즈를 만들었죠.”
1952년, 서울이 수복되자마자 퇴계로에 있던 건물 2층에 ‘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숍이었다. 당시 대중문화로 가장 크게 유행했던 것이 바로 연극. 최고 인기 극단이었던 ‘신협’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올렸고, 모든 무대의상을 노라노의 이름으로 도맡았다. 일종의 전속 디자이너였던 셈이다. ‘은장도’라는 사극을 통해 한복의 현대화를 처음 시도한 것도 그녀였다. 이를 본 국악단의 연락으로 국악 의상까지 맡게 됐다. 쇼, 연극, 무용, 국악단으로 이어진 무대 의상은 급기야 1955년 당대 톱스타였던 최은희가 주연했던 영화 ‘꿈’의 의상을 맡으며 영화계로 이어졌다.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영화가 큰 붐을 이뤘어요. 이후로 영화 의상을 많이 맡았는데, 기억을 다 못할 정도로 많은 작품에 참여했어요.”

영화배우라 해도 개런티가 많지 않으니 의상비를 지불하기 힘들던 시절. 톱스타들은 으레 계약조건에 ‘노라노 의상을 해 줄 것’을 명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의상을 담당하던 디자이너라곤 그녀가 유일무이했기 때문이다.
최은희, 엄앵란, 최지희, 문희 등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모두 대본을 들고 노라노를 찾았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TV 시대가 시작됐고, 드라마 의상 역시 그녀의 몫이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을 스타일링해 나라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숨은 주인공 역시 디자이너 노라노였다.


미니스커트 & 판탈롱의 숨은 주인공
1960년대에 접어들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흔이 잊히는 대신, TV로 상징되는 대중문화가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 지금이야 당연하지만, 당시만 해도 양장은 맞춤복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사이즈별로 대량 생산해 입어보고 사는 ‘기성복’의 개념은 아예 전무한 시절이었다.

“직장 여성들에게 더 싸고 좋은 옷을 입히자 결심했어요. 그때 캐치프레이즈가 ‘마음대로 입어보고 골라 사는 옷’이었죠.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땐 ‘기성복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를 두고도 말이 많았어요. 1963년 미우만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기성복 코너를 처음 열고, 백화점에서 첫 기성복 패션쇼도 열었죠.”

1956년 반도호텔 옥상에서 자기 손으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연 지 7년 만에 또 하나의 패션사를 쓴 것이다.

노라노에서 시작한 한국 패션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4년 미국 하와이 ‘아라모아나 빌딩’에 한국의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쇼룸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역시 한국 최초로 해외(하와이) 패션쇼를 열었다. 디자이너 노라노의 ‘원조’ 한류는 이후로도 착착 진행됐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했다. 그녀의 디자인을 눈여겨본 미국 뉴욕의 삭스피프스애비뉴(Sacks Fifth Avenue) 백화점에서 350벌의 옷을 주문했다. 패션의 심장부에 첫발을 디딘 역사적 순간이었다. 첫 경험을 바탕으로 1974년에는 뉴욕 플라자 호텔의 견직물 바이어 패션쇼에 참가했다. 1978년엔 뉴욕 7번가에 정식으로 쇼룸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인 메이시스(Macy’s) 백화점 1층의 15개 쇼윈도 전체를 노라노 컬렉션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패션의 본토에서 ‘노라노’라는 이름이 알려지는 데 걸린 세월이 30여 년. 삭스피프스애비뉴, 노드스트롬(Nordstrom) 등 유명 백화점에 노라노 코너가 설치됐다. 1984년에는 패션지 <보그>에, 1986년에는 <바자>에 노라노의 작품이 소개됐다.


패션 한류의 시작을 알리다
아는 사람만 아는, 하지만 알고 보면 굵직한 한국 패션사를 써내려갔던 해외 진출은 1995년 미국 사업을 접으며 막을 내렸다. ‘노라노 재팬’, ‘노라노 홍콩’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들면서 패션계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갭’, ‘자라’ 같은 대규모 기업들이 등장하며 부티크들이 설 곳을 잃기 시작했죠. 고급 패션이 사라진 자리를 진과 티셔츠가 차지했어요. 옷 장사는 우물쭈물하다간 금방 망해요. 현찰 장사라 위험하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엔 돈을 벌기보다는 일 년에 두 번씩 패션쇼를 열며 일을 놓지 않고 있어요.”
어느 디자이너 못지않은 이력, 그것도 ‘한국 최초’를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던 역사지만 정작 한국 패션의 뿌리를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심지어 패션계에 종사하고 있던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재조명 이런 거 원치 않아요. 나이 팔십 넘겨 더 이상 뭘 바라겠어요. 돈 많이 벌려고, 유명해지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에요. 그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계속 해왔을 뿐이죠. 한국도 패션이 붐을 탄 게 얼마 되지 않아요. 해외에 진출하고 명성을 얻었으면 뭐해요? 당시만 해도 한국 언론은 패션이 뭔지, 뉴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어요.”

미국서 처음 연 패션쇼를 찾았던 현지 기자의 기사가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돼 있는 이유다.

“패션쇼에 오라 해서 가 봤다. 별 생각 없이쇼를 봤으면 유럽 디자이너인 줄 알았을 것이다. 자료를 보니 한국 디자이너였고, 원단도 한국산이었다. 잘 절제된 우아함(well under, well controlled elegance)이 돋보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도전
명예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걸어온 패션 외길 60년. 2012년 어느 날 불쑥 숍을 찾아온 젊은 스타일리스트와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길로 이어졌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이라고 소개하더군요. 우리나라 패션의 뿌리를 찾고 싶다고 했어요.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가 걸어온 삶과 역사를 60주년 기념 전시회로 열자는 제안이었죠. 마침 저도 개인적으로 그동안 연을 맺은 고객들의 옷을 기증받아 정리하고 있던 참이라 ‘그럼 함께해 보자’고 동의했죠.”

2012년 5월, 드디어 노라노 패션 60년을 기념하는 ‘라비앙로즈(La Vie en Rose)전’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과 한국의 패션사, 기념전을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담아낸 다큐 영화 ‘노라노’도 얼마 전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기념전이든, 영화든 사실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기 이야기를 공표한다는 건 옷을 벗고 나서는 것과 같잖아요. 부끄러웠죠. 물론 자랑스러운 경험도 있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음양이 있는 것인데,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겠나 싶었어요. 하지만 전시회와 영화를 준비하며 젊은이들이 보는 시각과 나의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일체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도 궁금했고요.”

‘장밋빛 인생’이라는 타이틀 역시 맘에 들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지나온 시절의 영광만 보면 장밋빛일지도 모르지만, 그녀 스스로에게 인생은 매번 사선을 넘나드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나이 여든다섯에 인생을 돌이켜보니 가장 어렵고 힘든 결정이 두 번 있었던 것 같아요. 첫째가 이혼, 둘째가 미국 진출이죠. 두 가지 결정 모두 너무나 힘든 고민이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에요. 최고의 영광이기도 하고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침 4시 반이면 정확히 잠을 털고 일어선다. 아침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식사 후 걷기, 실내 사이클 등 매일 두 시간의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입원을 요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열이 펄펄 끓는 감기 같은 병으로 결근한 날은 지금껏 하루도 없다.

“건강의 기본은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요. 그때 미국 사업을 접지 않았으면 지금쯤 병원에 누워 있을지 몰라요. 전 욕심이 없어요. 그러나 평생을 ‘챌린지(challenge)’로 살아왔죠. ‘앰비션(ambition)’과는 달라요. 후자는 끝장을 보려는 거고, 전자는 영원히 지속되는 개념이에요. 안 되면 다시 하면 되는 것, 그게 바로 챌린지니까요.”

지금도 매일 청담동 숍으로 출근하는 85세의 현역 디자이너. 한미FTA 발효로 수출입 한도와 관세가 없어진 지금, 그녀는 다시 미국 진출을 준비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한국 패션계의 찬스예요. 미국을 비롯해 한류가 유행인 중국, 동남아시장 진출 준비로 엄청 바빠졌어요. 내년에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 중이에요.” 18년 만에 다시 나선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브랜드는 말할 것도 없이 ‘Nora Noh’다.


글 장진원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