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창의적 인재’를 찾아나서고 있다. 이 시대 교육의 트렌드는 ‘창의’로 요약되며, 하물며 정치까지 ‘창의’를 논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일찍이 ‘창의’를 핵심 키워드로 꺼내든 이가 있다. 이노디자인의 김영세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창의와 혁신을 강조하며 트렌드를 만들어온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김영세 대표를 만나기 위해 이노디자인 사옥을 찾았다.
[나의 꿈 나의 인생] 내 일(my business)을 즐기면 내일(future)이 생길 거야!
김영세 대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디자이너다. 미국 IT의 거장 빌 게이츠는 김 대표를 ‘디자인계의 지도자, 디자인 구루’라고 표현했을 정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고, ‘창의’와 ‘혁신’을 모토로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미국 IDEA 금·은·동상을 모두 휩쓸었고,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일본의 굿 디자인 어워드 등에서도 수상하며 이노디자인을 세계 10대 디자인 회사 중 하나로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아이리버의 목걸이형 MP3, 삼성 가로본능 휴대폰, 라네즈 슬라이딩 팩트 등의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


최근 굉장히 바쁘셨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이노디자인은 휴대폰, MP3, 카메라 등 다양한 히트 상품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이 의뢰한 업체의 브랜드를 달고 나왔기 때문에 이노가 디자인한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이노디자인이 자체 브랜드 ‘이노’를 통해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에요. 그 첫 번째 제품으로 여성을 위한 헤드폰 ‘웨이브’와 휴대용 스피커 ‘미니 튜부(Tubu)’가 출시될 거예요. 또 지난 6월부터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오픈 갤러리 ‘변신은 무죄’展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어요.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예술과 기업의 만남이 미래 경쟁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캠페인이죠. KOTRA의 회원사 중 17개 기업을 초빙하고,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이들 기업의 제품을 새롭게 디자인했어요. 기업은 각자의 브랜드와 철학을 홍보하면서 새롭게 창조된 자사 제품을 보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을 펼칠 무대를 가질 수 있죠. 저는 이 프로젝트에 학생들의 멘토로 참여했어요.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고 피드백을 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었죠. 그렇게 완성된 학생들의 작품은 오는 10월 4일부터 양재동 KOTRA 본사 1층 오픈 갤러리에 전시됩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셨나요?
국내 기업들도 전 세계의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플러스알파, 즉 매력 포인트가 필요해요. 이를 위해서는 ‘디자인’이 중요하고요. 세계로 눈을 돌리고, 예술과 디자인을 접목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런 부분에서 KOTRA 사장과 공감대가 형성되더라고요. 중소·중견 기업과 이노디자인의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 굉장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신인 디자이너에게 프로젝트를 제공하고 활동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주는 것도 제 오랜 꿈이었거든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뜻깊은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후배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 같고요.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였는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어요. 그 친구들을 만난 뒤 직원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죠. ‘내가 꿈꾸던 이노디자인의 역할이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고요. 프로젝트 기간에 이노디자인은 ‘이노디자인스쿨’로 변신했어요. 저는 총장이 됐고, 다른 3명의 팀장은 교수님이 됐죠. 기존의 직책 대신 총장님, 학장님, 교수님이라고 불렸어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콘텐츠를 제공하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준 것 같아 기뻐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이 자자해요.
그런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얻어요. 일을 위해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비행기 앞좌석에 앉은 꼬마일 수도 있죠.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을 통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거든요. 저는 늘 호기심, 궁금함을 갖고 관찰을 하기 때문에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뭔가 떠오르면 신나게 상상하고 스케치로 남겨요.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은 회사의 디자이너들에게 보여주면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생산하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메모나 스케치를 하는 것이 습관이셨나요?
스케치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긴 메모보다 스케치 한 방이 더 나아요. 메모는 잘 안 했는데, 최근에는 트위터를 통해 메모하는 것도 습관이 되고 있어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을 트위터에 올리거든요. 제 트윗은 100%가 메모예요. 얼마 전에는 ‘디자인은 움직이는 타깃을 향한 활쏘기와 같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디자인이 상품이 되어 출시될 미래에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란 미래에 미리 가보는 일이다’라는 트윗을 남겼어요. 자려고 누웠다가도 번뜩 떠오르는 말 있잖아요. 혼자 보기 아까운 그럴듯한 말….(웃음)


보기에 좋은 것을 만드는 게 디자인의 전부는 아니죠.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요.

좋은 디자인은 ‘진선미’를 다 갖춰야 해요. 기능이 좋고, 가격이 착하고, 모양이 아름다워야 하죠. 디자인은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이에요. 그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 굉장히 안타까워요. 많은 기업이 디자인은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잖아요. 사실은 시작 단계에 디자인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디자인의 사용자인 기업이 그에 대한 이해도가 정확한 것인지 걱정스러워요.
[나의 꿈 나의 인생] 내 일(my business)을 즐기면 내일(future)이 생길 거야!
디자이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바로 받게 되죠.
만족할 만한 피드백이 오지않을 때나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 이하일 때도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요?

디자인의 승률은 100%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스트레스를 받죠.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큰 스트레스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의 최종 타깃은 소비자지만, 그 전에 제조사라는 또 하나의 타깃을 갖게 되죠. 우리가 디자인한 것을 기업에서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많은 경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해야 하고, 실패를 삼켜야 하죠. 한국에서는 이상한 문제점도 있어요. 가끔 클라이언트가 디자이너와 계약 전에 답을 먼저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은 굉장히 불편해요. 일단 디자이너가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그에 대한 대가가 보장돼야 하거든요. 창의적인 활동에 대한 존중이 따라줘야 하죠. 이노디자인의 경우 절대 이런 식으로는 일하지 않아요.


굉장히 오래전부터 혁신, 창의 등을 강조하셨어요.
최근에는그런 부분들이 교육이나 경영 등 다방면에서 화두가 되고 있어요.

‘이노디자인’의 어원은 ‘이노베이션(innovation)’이에요. 그 이름을 만든 것이 30년 전이죠. 지금도 이 단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회사를 창업할 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겠죠. 여담이지만 한국에 이노디자인이 알려지고 나서 ‘이노OOO’의 브랜드가 3000개가 넘게 생겼다고 해요. 그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혁신이 생각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하죠. 국내에서는 ‘벤치마킹’ 같은 나쁜 단어만 좋아하는데 과연 창의적인 활동이 가능할까요? 또 그런 부분은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가 과연 창의적인 사람을 존중하는지도 의문이에요. 문화 자체가 창의적인 사람을 우대하는 시대가 와야죠.


새롭게 정의한 ‘퍼플피플’에 관한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보통 생산직을 ‘블루칼라’, 사무직을 ‘화이트칼라’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때 보니 애플의 스티브 잡스, 유튜브의 스티브 첸,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같은 리더들은 블루칼라도 화이트칼라도 아니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세상을 이끄는 사람들은 퍼플칼라 노동자, 즉 ‘퍼플피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정의한 퍼플피플은 일을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재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인상 쓰고 출근해서 오후 내내 졸다가 4시쯤에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잡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일을 즐기고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요.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할 뿐인데 사람들은 저에게 돈을 주거든요. 학생들도 그런 부분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하느냐라는 것이요. ‘내 일(my business)’을 즐기면 ‘내일(future)’이 생길 거예요.


퍼플피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들어야겠죠. ‘5년간 일하고 나서 내가 원하는 저 일을 할래’ 같은 생각은 문제가 있어요. 바로 지금 해야 해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세요. 그리고 항상 자신의 전문 분야에 열정을 가지세요. 퍼플피플이 꼭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식당에서 일을 하더라도 사장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손님을 위해 일한다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퍼플피플이 될 수 있죠.


이러한 신념이 자녀 교육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두 자녀분이 굉장히 ‘잘 컸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제가 아이들에게 영감을 받고 배우는 것이 많아요. 어느 날 큰딸 수진이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던 일이 재미없어져 다른 일을 하려 할 때 확인하는 자신만의 3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 설렐 것’, 둘째는 ‘일을 하면서 행복할 것’, 셋째는 ‘하는 일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굉장히 기특했어요. 결국 딸은 그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일을 찾았고 현재 모 스포츠 브랜드의 요가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유럽에서 해당 스포츠 브랜드의 모델로 크게 사진이 걸리기도 했죠. 아들은 제가 강조하는 ‘Design is Loving Others’를 떠올리게 해줬어요. 아들이 열다섯 살쯤이었을 거예요. 어머니날(미국 Mother’s Day) 엄마에게 쿠폰을 선물했어요. 세차하기, 빨래하기, 유리창 닦기 등 자신이 엄마를 대신해 할 일을 한 장 한 장 적고, 각각 사용할 수 있는 유효기간을 적어놨더라고요. 그런데 흐뭇하게 보던 아내가 마지막 쿠폰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마지막 쿠폰의 내용은 ‘LOVE’였는데 기간은 ‘forever’였죠. 그것을 보면서 디자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드님은 ‘솔튼 페이퍼’로 활동 중인 가수죠?
그동안은 MYK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이승환 씨 소속사에 스카우트되면서 이름을 ‘솔튼 페이퍼’로 바꿨어요. ‘유희열의 스케치북’ ‘콘서트 7080’ 등의 방송에 출연한 후에는 인기 검색어에 올라갔죠. 이승환 씨가 아들의 음악만 들어보고는 ‘최고다’라고 생각했대요. 그러면서 얼굴을 보기 전이라서 ‘제발 잘생겼어라’ 기도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직접 만나보고는 ‘큰 물건 건졌다’며 굉장히 좋아했다고 해요.


대학 시절 가수 활동을 했을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으시죠?
가수로 활동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죠. ‘아침이슬’을 작사·작곡한 가수 김민기 씨가 앨범을 냈을 때 ‘친구’라는 곡만 같이 불렀거든요. 민기와는 대학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친해졌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고, 민기도 음악을 해왔었죠. 그게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함께 노래 한번 해보라며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앞에 나가 즉흥 연주를 하며 노래를 했어요. 그 후 학교에 갔더니 우리 둘을 ‘도비두’라고 부르더라고요.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도깨비 두 마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도비두’가 결성돼 함께 공연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죠.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 문제로 굉장히 힘들잖아요.
특히 디자인 분야는대부분이 경력직을 선호하고 있어서 취업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디자인 분야에서는 경력이 굉장히 중요하죠. 하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은 경력이 없잖아요. 저도 시카고에서 유학을 마치고 취직을 할 때 경력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10여 곳에서 퇴짜를 맞았죠.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돼요. 이노디자인도 경력이 없는 신입 친구들을 자주 채용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입이라고 절대 안 된다는 것도 없죠. 포트폴리오에서 눈에 띌 정도의 창의성이 느껴지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디자인의 범위를 너무 전공에만 매여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리콘밸리에 에어비앤비(Airbnb)라는 회사가 있어요. 창업자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죠. 에어비앤비는 세계적인 숙박 공유 사이트예요. 집을 가진 사람이 며칠 집을 비울 경우 사이트에 올리면, 여행하며 숙박을 원하는 사람과 연결이 되는 거죠. 굉장히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만약 에어비앤비의 창업자들이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일만 생각했다면 지금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죠. 디자인은 시장을 만들고, 창조하는 일이에요. 자신의 전공에만 국한돼 좁은 시야를 가지면 안 돼요. 졸업과 동시에 전공의 개념을 버리고 더 넓은 세상에 도전해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글 박해나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