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지난 1월의 어느 이른 아침, 김인혜(가명·25) 씨는 막 문을 연 H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들어섰다. 김 씨는 지난해 1학기에 졸업 학점을 다 땄지만 지금까지 논문을 제출하지 않아 졸업을 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 바쁘거나 논문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졸업을 미루는 졸업유예자다.

열람실에 자리를 잡은 김 씨는 오전 내내 취업 관련 책을 읽었다. 주로 서류 전형·면접 관련 지침서들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일정이 그를 기다린다. 자격증과 OPIc 공부를 해야 하고, 저녁에는 제2외국어 공부나 한국사 같은 면접 대비용 상식 공부를 한다. 수시로 입사지원서를 넣고 있는 데다 필기 전형, 면접 일정이 언제 잡힐지 몰라 학원에 다닐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김 씨는 그날의 마지막 할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요즘은 이력서에 블로그 주소를 적으라는 회사가 많아 포스팅을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 내일 해가 뜨면 다시 똑같은 일과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학교에 가지만 강의를 듣는 학생은 아니고, 그렇다고 졸업생도 사회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캠퍼스의 졸업유예자들 “나는 아직 학생이고 싶다!”
학생? 졸업생? 취준생?

김 씨처럼 캠퍼스를 ‘표류’하는 졸업유예자가 적지 않다. 신분은 대학생이지만 실상은 대학 생활을 다 끝낸, 무늬만 학생인 채 취업 준비에 올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졸업유예를 자청한 이유는 대개 한 가지로 모아진다. 졸업과 동시에 사라지는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조금이라도 오래 붙들기 위해서다. 졸업과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백수’가 되는 현실의 불안이 졸업유예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졸업을 유예한 이유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불안감’ 때문이에요.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졸업했을 때 내가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는 불안감 때문이죠.”

올해 졸업유예를 선택한 김세민(가명·25) 씨는 “대학생이라는 소속감이 안정감을 준다”며 웃었다. 그뿐 아니라 “졸업생보다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학생에게 기회가 조금 더 주어진다”며 “예를 들면 기업 인턴십에 졸업생은 지원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다.

김 씨의 학교는 졸업유예 제도가 없어 졸업 요건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비워놓아 재학생의 신분을 유지하는 ‘편법’을 써야 한다고 했다. 졸업을 미루기 위해 학생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라고. “아직도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고민한다”는 김 씨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시간을 번다는 심리적 안정을 얻고 있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공 상관없이 늘어나는 졸업유예자

“사실 ‘빨리 졸업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는데,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의 말을 듣고 보니 빨리 졸업하면 득보다 실이 많더라고요. 제 생각이 짧았던 거죠.”

“졸업하면 당장 학교 앞 할인행사도 참여할 수 없다”며 자못 진지한 말투로 답한 김인혜(가명·25) 씨는 사범대 학생이다. 학과 특성상 일반 취업보다 고시에 집중하기 때문에 조기 졸업이 흔한 일이라고 했다. “유예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고 손사래를 치던 김 씨는 “학교에 내는 비용도 감수할 만하다.

대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나 혜택이 많으니 그 타이틀을 유지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일정 비용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만큼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가치가 높게 책정되고 있는 셈이다.



돈을 받고 대학생 신분을 주는 학교

“글쎄요, 일종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불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소 씁쓸한 어조로 입을 뗀 방용찬(가명·28) 씨는 현재 학교 측에 유예 비용을 내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나 방 씨가 다니는 학교는 졸업유예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곧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꿀 예정이다.

“앞길에 대해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사람이라면 추천합니다. 여러 방안 중 그나마 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배나 동기들의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졸업유예 제도를 알게 되었다는 방 씨. “8학기를 모두 마쳐도 졸업예정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취업이 되기 전까지는 유예를 할 계획이다”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유예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취준생의 의지나 희망을 꺾을 수도 있다”며 “‘다음에 또 유예하지 뭐’라는 생각보단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졸업유예 결심 전 체크할 다섯 가지
“졸업유예는 대안이 아니다”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졸업유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하니 나도 하자는 식의 선택은 위험하다. 졸업유예를 통해 성공적인 진로 개척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취업전문가에게 물어봤다.(도움말 김치성 제닉스 취업솔루션 대표·신길자 언니네 취업가게 운영자)
캠퍼스의 졸업유예자들 “나는 아직 학생이고 싶다!”
스스로 졸업생이라고 인식하라

졸업을 유예하면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아직 ‘학생’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지 이름만 대학생일 뿐 취업에 올인해야 하는 건 결국 졸업생과 마찬가지. 졸업유예로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스스로 ‘졸업생’이라는 인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계획표는 필수다

대부분 토익 점수나 자격증 같은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예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험일을 미리미리 체크한 뒤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시간 낭비일 뿐이다.


꾸준히 지원하며 감각을 유지하라

졸업유예 후 마치 수험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유예기간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하반기에 잘 봐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금물. 유예를 시작한 순간부터 꾸준히 지원해야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공지가 있으면 언제든지 지원하라. 특히 졸업생이 갖지 못하는 기회인 ‘인턴십’을 노려라.


졸업유예에 의미를 부여하라

졸업을 유예했다면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라. 면접 과정에서 인사담당자들은 지원자가 졸업유예를 했는지 여부를 바로 안다. 왜 학교를 더 다녔는지 물어보는 건 당연지사. 그때 어떤 목표로 했는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 같은 공부를 했어도 단순히 ‘토익 공부를 했다’와 ‘깊이 있는 어학 공부를 위해 유예했다’는 다르다.


기회비용을 따져서 결정하라

유예를 결정하기 전이라면 인사담당자에게 졸업생과 졸업유예자는 졸업 후 6개월까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특히 유예기간 동안 등록금을 내야 하는 학교의 경우 그 비용을 차라리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코스’ 같은 교육에 쓰는 게 더 이로울 수 있다. 단순히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유예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글 이시경 인턴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