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취존(취향존중) 끝에 낙(樂)이 온다

[한경잡앤조이=조혜원 시나몬 콘텐츠 디렉터] 나의 직함은 콘텐츠 디렉터다. 현재 우리 회사는 혼자서도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3D 영상 제작 플랫폼을 개발 중인데 콘텐츠 디렉터의 역할 중 하나는 그 플랫폼에서 좋은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도록 여러 파트를 돕는 것이다. 가령, 시나리오팀과 기술 파트인 프로그램팀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시나리오 PD나 작가님들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콘텐츠나 자료 등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여러 아이디어와 의견을 제공하고 주고 받으면서 더 창조적이고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생산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그 조율의 근간은 유저가 어떤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은지, 또 어떤 콘텐츠를 보고 싶은 지에 대한 분석과 이해일 것이다.

‘개취(개인의 취향)’나 취존(취향존중)’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시대다. 초개인화 시대, 취향 소비의 시대라고도 한다. 자신의 취향을 바탕으로 덕질을 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통을 강화하고, 서로 공유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내가 만드는 플랫폼을 통해 어떤 소재와 장르의 제작물들이 나올 수 있을까’ 초개인화시대에 환영 받을 만한 콘텐츠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요즘 인기 있는 소재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최근 콘텐츠 시장의 화두는 역시 ‘BL(Boys Love)’이다. 그 열풍을 이끌고 있는 왓챠의 드라마 ‘시멘틱 에러’, 시멘틱 에러는 첫 공개 후 왓챠에서 8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공개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왓챠 시청 순위 TOP 10 상위권에 머물며 장기 흥행 중이다. 인기에 힘입어 8월 극장판 개봉도 앞두고 있다. ‘양지로 나온 BL’이라고 하지 않나. 여러 OTT 서비스 등에서 BL 시트콤이나 드라마 제작을 서두르는 등 BL은 주류가 되어버린 서브컬쳐의 아이콘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사진 출처=왓챠 '시멘틱 에러'.
△사진 출처=왓챠 '시멘틱 에러'.
내 또래 다수가 그렇듯 나 역시 청소년기에 BL을 처음 접했다. 지금은 웹툰이나 웹소설, 그리고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계에서 BL이 하나의 장르로 여겨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BL은 확실히 음지 속의 문화였다. 취향을 공유하는 몇 명의 친구들끼리만 옹기종기 구석에 모여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팬아트나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주인공으로 쓴 팬픽 등을 봤던 기억이 난다. 어떤 캐릭터들을 연결하여 짝을 지어주는 것을 커플링이라고 부르는데 카드캡터 체리나 나루토처럼 브로맨스가 등장하는 콘텐츠 속 캐릭터들이 커플링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연애담처럼 평범한 장르도 아니었고, BL을 모르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분명 음지에 있었던 게 맞긴 맞는데, 구석에서 BL 콘텐츠를 보던 내가 “어제 시멘틱 에러 봤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다니. 덕밍아웃 해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다니. 격세지감이 이런 걸까?
△사진 출처=카드캡터 체리.
△사진 출처=카드캡터 체리.
전문가들은 이 같은 비주류의 약진 현상의 원인에 대해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마이너 장르를 향한 시선이 늘어나는 영향이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비주류 장르가 떠오르는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지만, 기존 인기 장르의 뒤풀이로 인해 그에 대한 권태가 커지며 낯선 장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마이너 장르라고 불리는 콘텐츠들이 수면위로 올라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의견을 보태 본다. 콘텐츠 하나를 제작하는데 수반되는 비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창작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장르들을 위주로 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메이저 중의 메이저, ‘대중 문화’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고 ‘국민 가수’, ‘국민 가요’ 라는 말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용 외에도 높은 진입 장벽들이 존재했다. 가령, ‘소설을 쓴다’, ‘작가가 된다’고 하면 등단 혹은 당선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했다. 자기 취향이 뚜렷한 평가자들의 기준과 눈높이를 맞춰야 했다. 그러다 PC통신의 탄생으로 일반인들이 썼던 판타지 소설이나 연애담이 인기를 얻어 책으로 출판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모티콘이 들어간 10대 타깃의 양산형 로맨스 인소(인터넷 소설)가 등장하더니, 웹툰과 웹소설에 대한 수요가 높은 시대가 되었다. 시멘틱 에러의 원작도 리디북스의 웹소설이다. 이제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그리고 클릭 한 번만으로 쉽게 읽고 볼 수 있다.

뻔한 것이 지겨워 새로운 것을 찾다 낯선 장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애초에 접할 기회가 많아야 한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취향 소비, 초개인화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능하게 된 것이다. 두루두루 많이 접해야 나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고, 심지어 모바일만으로도 어디서든 작품을 만들고 열람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쉽게 공유하고 확산시킬 수 있다.

다양한 개인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소재와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내가 만드는 플랫폼을 통해서도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저 수면 아래 있는 상상력과 꿈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제작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콘텐츠를 뚝딱뚝딱 만들어서 세상에 선보일 사람들도 늘어나고, 사람들은 골라 먹는 재미가 있고 일석이조 아닌가.
△사진 출처=시나몬이 개발 중인 3D UGC플랫폼 ‘프로젝트D(가칭)’의 다양한 영상 콘텐츠 구현 이미지.
△사진 출처=시나몬이 개발 중인 3D UGC플랫폼 ‘프로젝트D(가칭)’의 다양한 영상 콘텐츠 구현 이미지.
현 회사에서 동료들과도 최소 주마다 한번씩은 모여서 각자가 보고 즐긴 콘텐츠에 대한 논의를 한다. 얼핏 듣기에는 잡담 같을 수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 이야기 속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즐기고 있는 콘텐츠도 다 다르고, 그 콘텐츠에서 포착한 어필 포인트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쏟아 내니 맥락을 모르는 제 3자가 들었을 때에는 조금 황당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그 어떤 것 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아이디어이며, 시나리오로까지 발전되는 원석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타인의 생각과 취향을 존중하면 우리에게 낙이 온다. 볼거리, 즐길거리들이 넘쳐나길 바란다.

조혜원(해초) 씨는 스타트업 경력 10년차. 성장하던 회사, 폐업한 회사를 거쳐 현재는 UGC(User Generated Contents)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콘텐츠 플랫폼 ‘시나몬(Cinamon)’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시나몬에서의 직급은 콘텐츠팀 디렉터로 요즘 내년 초 출시할 3D UGC플랫폼 ‘프로젝트D(가칭)’ 개발에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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