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실패해도 괜찮아’의 역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고민이 생겼다. 업무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앞으로의 인생이 평탄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툭 솟아올랐다. 경험이 압축된 20대 초반을 지나며 ‘앞으로 고민을 고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으로 목표를 잡자’고 다짐했건만, 나를 괴롭히는 게 생겨버렸다.

누군가 고민의 흔적은 딱지가 되어 인격의 자산이 된다고 했던가. 사실 나의 고민도 극복하면 먼 훗날 ‘성장이었다’라고 회상할 종류의 것이라 그 말이 틀리진 않은 걸 스스로도 안다. 하지만 당장 기력이 없기에 경험을 사지 않고 상처도 없으면 안 될까, 같은 투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착실하게 나만의 대답을 찾아낼 건 뻔하다.

내 고민과 별개로 벽에 부딪혀 이겨내 성장하고, 안 될 것 같은 일도 도전하는 게 청춘의 미덕이고 의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하지만 반문하고 싶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그럴 여유가 충분한가? 어리숙한 사람은 도전하고, 숙련자는 기다려줄 시간과 자원이 있긴 한 건가? 그리고 그걸 청춘에게 “부여”하는 건 옳은 일인가?

얼마 전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최고령 수험생 김정자 할머니가 화제였다. 김 할머니는 “자식을 다 키워낸 뒤 평생 한이 됐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만학도가 됐다”고 밝혔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업을 마치고 여유가 생긴 다음에야 나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김 할머니처럼 나이와 사정이 다양한 모든 사람의 도전에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이미 이뤄본 사람들이 시간을 내야 한다는 시혜적인 시선은 아니다. 누구나 새로운 시도, 혹은 실패를 하더라도 회복할 수 있는 안전망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실패에 너무 야박하다.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내 고민을 들은 누군가가 사회초년생이라면 당연히 겪는 단계라고 판단했다. 맞다. 내 고민은 ‘소통에 있어 다른 사람이 내 표현을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말하는 걸 어떻게 단숨에 해내는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단숨에’다. 상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야 하니까 기다려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무조건 저자세로 일관하면 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른바 ‘쿠션어’는 그래서 개발된 거라고 조언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말을 툭툭 내뱉고 ‘싸가지 없는 후배’처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려 깊은 말투라는 건 사회성의 영역이다. 그래서 현재 내 고민은 아직 자라지 못한 사회성을 키우는 첫 단추라 느낀다. 그렇기에 지면에 이 고민을 전시하는 것도 조금은 고민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 비슷한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게 될 때를 기대하며 글을 쓴다. 나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고, 아무래도 이게 잘못된 방향의 고민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내게 고쳐보면 좋겠다고 조언한 선배는 바꿔보겠다는 마음이 소중한 거라고도 말해줬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 여전히 잡히지 않는다. 고민을 덜어보기 위해 포털을 돌아다니다가 ‘요즘 애들 대학생 티 왤케 못 버리냐’는 글을 봤다(지금은 원글을 찾을 수 없다). 글쓴이의 논조는 신입사원들이 대학생 때 쓰던 말투를 못 고치고 상사나 고객사에 깍듯하게 말하지 않는 게 보기 싫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동조하며 신입사원은 못 배운 애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글을 읽고 든 첫 생각은 “가르쳐나 줘보고 씹는 건가”였다.

우리는 무한경쟁시대에 발을 들이며 비슷한 레벨에서의 경쟁을 넘어 태생부터 다른 ‘수저론’을 지나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도전은 경제적인 부를 가져오지 않으면 모두 폄하되고 있다. 도전이나 시도, 꿈 같은 건 몽상가의 단어가 되어버리거나, ‘20대에 10억 벌기’라는 경제 콘텐츠에 쓰인다. 정말로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힘을 얻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린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헤매는 건 결국 이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는 지름길이라는 조급함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를 무작정 비난할 생각은 없다. 거대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발전과 성장은 좋은 거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내가 부서질 듯 위태롭게 성장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자기학대라고 생각한다. ‘알을 깨고 나오니 새로운 세상이었다’는 문구의 중요한 점은 깨진 게 알이라는 점이다. 깨진 건 새의 머리가 아니라 알이다. 나 또한 나를 조급함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잘 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황태린 님은 지구종말론의 혼돈 속에서 태어나 자연에게 배우며 자랐다. 역사, 심리, 소설, 인간, 테크 등 다양한 분야를 ‘덕질’하던 유년을 지나 지금은 홍보대행사 2년차 막내 직원을 거치는 중이다. 문예창작 전공으로 글로 배운 건 글뿐. 세상을 온몸으로 버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